제3국행 포로

1954년 2월21일, 한국전쟁 당시 전쟁포로였던 88명이 인도행 배 아스토리아호에 몸을 실었다. 북한군 포로 74명, 남한군 포로 2명, 중국군 포로 12명이었다.

북한군과 남한군 포로 출신 76명은 남과 북 어디로도 가기를 바라지 않았고 중국 포로 출신 12명 또한 중국이나 대만으로 가기를 원하지 않았다. 이들은 갈등과 대립의 한편에 서기를 거부하고 ‘제3국의 선택’을 했던 것이다. 이들은 뚜렷한 사상적 지향에 따라 ‘중립국’을 선택했다기보다는 전쟁이 없는 곳으로 가고 싶어 ‘제3국’을 선택했다.

당시 중립국감독위원회 K.S 티마야 위원장은 처음부터 인도를 선택한 사람은 15명이었고 대부분은 미국으로 가기를 원했다고 회고록 ‘판문점일기’에서 밝혔다.

미국은 중립국이 아니라는 이유로 이들을 받아 들이지 않았다. 그러자 인도에 간 포로들 가운데 과반수가 멕시코(29명) 등 남미행을 원했다. 멕시코에서 영어를 배워 미국으로 가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멕시코도 이들을 받지 않았다.

1956년 2월, 50명의 북한군 포로 출신과 6명의 중국군 포로 출신이 브라질로 떠났다. 애초 브라질로 가겠다는 이는 3명에 불과했다. 인도·브라질·아르헨티나 등의 ‘이민 1세대’가 되어버린 이들 가운데 일부는 현지에서 나름대로 탄탄한 기반을 잡았다. 그러나 뿌리를 내리지 못한 채 전쟁의 상처를 보듬고 살아가는 이들도 적지 않다.

정전 50년이 지났지만 대한민국은 이들을 기억하지 않는다. 1999년 외교통상부가 펴낸 ‘한국외교 50년’에는 이들에 대한 언급이 없다. 전쟁기념관의 포로송환 및 휴전협상 관련 설명에도 이들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좌우 이념 대립이 없는 조국에 돌아올 날을 기다리며 정치·경제적으로 불이익을 당하고 있음에도 아직도 무국적자로 남아 있는 경우가 많다. 불법체류자라고 하여 외국인노동자들을 추방하고 붙잡아들이면서 재외동포들은 왜 기억하지 않는가. 자의로 제3국을 선택했지만 무국적자로 살고 있는 전쟁포로들을 이제는 생각해야 한다./임병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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