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 장군 동상

"충무공 이순신 장군(1545~1598)은 ‘백의종군(白衣從軍)’의 대명사라고 할 수 있다. 첫번째 백의종군은 장군이 43세 때 였다. 두만강 녹둔도(鹿屯島)에서 근무할 무렵이었다. 가을에 여진족이 급습해 군사를 살해하고 60여명을 납치해 갔다. 장군이 즉각 추격하여 구출해 왔지만 조정은 장군의 책임을 물어 장형(杖刑)과 함께 조산보만호(造山堡萬戶)라는 직책의 옷을 벗겼다. 그해 겨울 큰 공을 세워 복직했다. 녹둔도는 1860년 청나라와 러시아의 베이징조약 체결로 러시아 땅이 되었는데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장군의 전승 비각이 있었다고 한다.

두번째 백의종군은 원균의 모함으로 한양으로 압송돼 삭탈관직을 당한 일이다. 모진 고문을 당하면서도 장군은 남을 끌어들이지 않았다. 선조는 장군을 죽일 죄목을 찾지 못해 석방했다. 무보직 상태로 남해안의 병영으로 가던 중 장군은 모친의 부고를 전해 들었으나 임지로 향했다. 원균의 패전과 전사로 삼도수군통제사에 복귀한 장군은 전함과 군사들을 정비해 명량해전에서 대승리를 거뒀다. 이듬해인 1598년에도 노량해전에서 일본 수군을 궤멸시켰으나 적의 탄환에 왼쪽 가슴을 맞고 전사했다. 장군은 “싸움이 한창 급하다. 내가 죽었단 말을 하지 마라”는 유언을 남기고 숨을 거둔 것으로 알려진다. 승리가 확정된 음력 11월 19일 새벽이다.

러일전쟁에서 러시아의 발틱함대를 무찌른 일본의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은 “나를 넬슨에게 비기는 것은 가하나 이순신에게 비기는 것은 감당할 수 없는 일”이라고 했다. 장군의 생애는 애국, 그 자체였다.

최근 서울시가 광화문 광장을 조성하기 위해 내년 봄 세종로에 있는 충무공 동상을 옮길 예정이라고 밝힌 뒤 찬반 논란이 분분하다. 이전론자들은 “1968년 당시 세종로 이름에 걸맞게 세종대왕 동상을 세울 계획이었는데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충무공 동상이 세워졌다”고 주장한다. 세종로에 세종대왕 동상을, 충무로에 이순신 장군 동상을 세우자는 의견도 있지만, 광화문 광장을 조성하면서 충무공 동상을 옮기려고 한 발상 자체가 이상한 노릇이다.

/임병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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