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런과 셸리, 그리고 키치는 19세기 초반 낭만주의 시대에 별처럼 빛났던 시인들이다. 바이런과 셸리가 낭만주의의 시발점이 된 ‘슈트롬 운트 드랑(질풍과 노도)’의 세월을 살았다면 키츠의 삶은 좀더 은밀하고 영적(靈的)인 향기로 채워졌다.
바이런은 ‘시단(詩壇)의 나폴레옹’이었고, ‘겨울이 오면 봄이 멀지 않으리’라던 셸리는 인류의 개조를 꿈꾸었다. 셰익스피어의 진정한 후계자였던 키츠는 고전에 뿌리를 두고 지극히 미학적인 예술세계를 지향했다. 바이런의 뜨거운 정열이나 셸리의 웅변에 비해 키츠의 정서는 섬세하면서도 단아했다. ‘희랍의 옛 항아리’라는 詩에서 키츠는 “들리는 멜로디는 달콤하다 / 들리지 않는 멜로디는 더 달콤하다”고 노래했다. 바람을 맞으면 저절로 울린다는 에을리언 하프처럼 섬세한 감성을 지닌 키츠는 1821년 이국 땅에서 연인 패니 브라운이 준 흰색 조약돌을 손에 꼭 쥔채 폐결핵으로 숨졌다. 키츠의 묘비명(墓碑銘)엔 그의 유언에 따라 이렇게 씌었다. “여기 물 위에 이름을 쓴 자 잠들다”
묘비명은 죽음의 형식이자 매장의 양식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고인의 공적을 기리는 취지는 같다. 서양에선 교회 내에 매장하는 풍습에 따라 석관의 뚜껑에 묘비명을 새겼다.
우리 나라는 입석(立石)에 치적을 열거함으로써 고인의 명예를 빛냈다. 한때 조선 선비들 사이에선 스스로 짓는 묘비명, 즉 자명(自銘)이 유행했었다고 한다.
퇴계(退溪) 이황(李滉)은 숨지기 나흘 전 4언(言)24구(句)로 이렇게 자명을 썼다. “나면서부터 크게 어리석었고 / 자라면서 병이 많았네 / 말년에 외람되게 벼슬이 높았네 … 근심 속에 즐거움 있고 / 저 세상으로 떠나며 생을 마감하는데 / 다시 무엇을 구할 것인가”
안분지족(安分知足)하고 삶에 감사하며 떠나는 마음 가짐이 표연하다. 올해 73세인 원로작가 한말숙씨는 지난해 “평생 감사하며 살다가 한점 미련없이 생을 마치다”라고 미리 남기는 유서를 썼다. 퇴계의 자명을 연상케 한다. 이 생각 저 생각이 많을 때는 자명을 쓰고 싶다.
/임병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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