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춘추/우리네들의 삶

휴일이다. 아침 일찍 산을 향해 떠났다. 아침부터 서둘지 않고는 이래저래 나서기가 쉽지 않다. 산에는 벌써 개나리, 진달래, 목련 등 화려한 꽃잔치를 끝내고 이제 신록빛을 내기 시작한다. 한달 사이에 초여름이 된 듯하다.

지난 겨울엔 눈이 올 때마다 묘하게 산에 오르게 되어 눈꽃을 즐겼다. 매번 올 때마다 전혀 색다른 모습이다. 산길을 올라가면서 산수유, 찔레꽃, 철쭉, 굴참나무, 단풍나무… 아는 이름을 붙여본다. 겨울에는 다들 마른 가지 같아서 어느 것인지 잘 모르겠더니 어느 결에 앞 다투어 자기이름을 얘기한다. 어린 나뭇 가지에서 푸른빛들이 돌기 시작한다. 꽃들도 제법 피었다가 사라진 흔적들이 있다.

눈에 띄는 것은 나이 많아 고목은 아닐까싶던 나무들조차 푸른빛을 내고 생명이 있음을 보여준다. 그 나무 어디에 그것들을 감추었는지, 나이 많아 내 나이는 되었을 만한 그 몸에서도 예나 지금이나 똑같은 잎을 내고 꽃을 피운다. 섭리에 따라, 그 몸에 기록한대로 꽃을 피우고 잎을 내고 그러다가 또 낙엽을 떨구고 겨울을 살 것이다. 그렇게 한해를 보내면 나무는 뿌리가 더 깊어져 있고 키가 자라있고 나이테가 한 겹 늘어있겠지. 나는 그 섭리에 따라 살고 있는지 새삼스럽게 질문이 들어온다.

사람은 어리면 어리다고 제값을 안쳐주고 또 나이 먹으면 먹은 만큼 존경받지 못하는 요즈음, 나는 이미 나의 삶을 퇴색한 것으로 보고 있지 않는지, 나는 나의 하루하루에 대해 얼마나 기대하고 있는지, 내가 생동감 있게 어떤 일을 해본지가 얼마나 되었는지… 어린 나무에게 계절을 겪으면서 얻게 되는 성장이 있듯이, 나이 많은 나무에게도 동일한 무게가 있는 것을 본다.

자라나는 젊은이들에게 뿌리 깊은 나무의 위용을 보여주고 매년 몸 안에 연륜을 새겨갈수록 더욱 매력 있는 삶이 있는 것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젊은이들로 하여금 나이 먹은 것을 기뻐하고 자랑스러워하게 할 수는 없을까? 오늘 산이 아름답게 보이는 것은 여러 종류, 여러 세대가 어우러져 섭리에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네들의 삶이 그렇지 못한 안타까움이 마음 한켠에서 올라온다. 한편으로는 격려와 도전도 받는다. 내 안에 아직도 감추어져 있는 푸르름이 있어서, 섭리에 따라 드러내지고 피어날 것에 대해 신선한 기대감으로 마음 안에 품어본다.

여러 가지 생각과 나무들의 어우러짐을 내 안에 담아 산을 내려오면서, 산에서의 오늘은 특별한 쉼이 있었다는 느낌이 든다. 오늘의 쉼으로 시작하는 내일은 어제와 다른 넉넉한 일상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임용걸.가톨릭대 성빈센트병원 의무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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