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교산의 아침/여성문화예술제에 대한 소묘

자작나무 한그루와 느티나무 두그루, 백양나무 세그루, 굴참나무 여섯그루.

멀리로는 시베리아 대륙부터 가까이로는 한반도 남녁지방에서 연지와 곤지 바르고 시집을 온 나무들 사이로 수줍게 얼굴을 붉히고 서있는 봉숭아꽃과 옹기종기 고개를 수그리고 앉아 있는 숱한 민들레들과 엉겅퀴, 강아지풀.

이들 사이로 야트막한 구릉과 언덕들 사이로 내려다 보이는 강변에서 뛰어와 연신 거친 숨을 내쉬는 바람.

주말이 시작되는 오후 어느 시골 정경은 이처럼 한가로웠다. 딱히 허리를 구부리고 모를 내다 허리를 펴고 이마의 땀을 연신 훔치는 농부들의 모습도, 그렇다고 “훠이 훠이” 추임새를 흘리며 헤진 그물 코를 깁는 어부들의 바쁜 손놀림도 없는 시골인만큼 정확하게 표현한다면 한가로운 게 아니라 고즈녁스럽다는 게 옳을듯 싶었다.

계절의 여왕이라는 5월 첫째날 오후 2시께 여주군 강천면 굴암리 9의3.

새삼스럽게 딱딱한 행정지명을 들먹이는 까닭은 어느 곳이길래 호들갑을 떠느냐는 반문이 쏟아질듯 싶어서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시시각각으로 이지러지는 풍경 위로는 햇살이 수정가루처럼 하얀 분말로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승용차 1대가 겨우 지나갈만한 길을 따라 들어 가다 도착한 이곳에는 교실 세칸을 갖췄던, 그러나 지금은 폐교된 학교 건물이 아담한 운동장을 어줍잖게 내어 보이며 이방인들을 맞고 있었다.

을씨년스러운 교문 위로는 ‘2004 여성문화예술제’라고 적힌 플래카드가 걸려 있었고 학교 옆 얕은 언덕엔 매표소까지 갖췄다. 정문을 들어서면 만나는 느티나무는 온통 붉고 푸른 만장으로 뒤덮혀 있었고 눈을 부릅 뜨고 서있는 장승도 이날만큼은 외할아버지처럼 인자하고 온화했다. 시골학교 운동회처럼 만국기도 걸려 있었고 광목으로 만든 고풍스러운 천막도 설치됐고 잡음 하나 없는 깨끗한 음향을 내는 앰프도 마련됐다. 무엇보다 신기한 건 앙증맞은 학교 건물 위로 걸려 있는 하늘이 비치빛이란 사실이었다.

이곳은 2년 전부터 천연염색을 통해 환경운동을 펼치는 이민경 선생이 자비를 털어 차린 국내 유일한 ‘여성생활사박물관’으로 몇칸 되지 않는 교실은 부엌용기류와 옷감 짤 때 사용되던 기구, 전통생활용기, 복식류 등이 가지런하게 전시되고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대장경호, 용목나무 냉장고, 물허벅, 십각놋화로, 방구리, 올챙이국수틀, 곱돌주전자, 배냇저고리, 벼메기솔, 주칠반닫이, 순백자 뿔등잔, 편교자, 뒤주, 돈궤….

화단을 옆으로 끼고 현관으로 들어서면 복도 사이로 난 교실들마다 이처럼 이름만 들어도 정겹고 정다운 생활용품들이 돌아 가신 친정 어머니가 돼 어렵고 가파른 세상을 살고 있는 이 땅의 딸들을 맞고 있었다.

평소에는 뜨락 넓은 고가처럼 고즈녁했지만 이날만큼은 200평 남짓한 운동장 곳곳이 잔치집처럼 술렁거렸다. 서울 동숭동 대학로도 아니고, 그렇다고 이름이 제법 알려진 관광지도 아닌, 여주읍내에서도 한참을 들어 가야 하는 산골에서 열리는 행사였다. 그것도 개념도 낯설은 여성문화예술제였다.

‘여성’이란 접두사가 걸려 있어 여성, 혹은 여권신장 등과 관련된 이벤트라는 점은 짐작되지만 상당수 이방인들에겐 속내를 열어 보이지 않았다.

도대체 왜, 무엇을 위해, 무엇때문에 마련됐을까.

“이번 총선을 통해 진보세력들의 약진이 두드러지고 여성 국회의원들의 진출도 눈에 띄게 늘었고, 항간에선 다음에는 어쩌면 여성 대통령도 나올 것이란 예측도 있지만 아직도 우린 여성문제만큼은 인색한 후진국이라고 생각합니다”

행사를 준비하는 관계자들의 의지가 살짝 엿보였지만 그래도 물음표는 남았다.

남성이면서 이 일에 뛰어든 박태명 화백도 여성문제 만큼은 의견이 당당했다. “산술적으로 단순하게 남성과 동등하다는 궁색한 의미를 뛰어 넘는 그 무엇. 새로운 시대를 맞은만큼 우리의 여성관도 확 바뀌어야 합니다”

조용한 풍경 속에서 여성들의 용기 있는 혁명이 이제 막 시작되고 있었다.

여성이 아닌, 그렇다고 철저한 페미니스트도 아닌 숫기 없는 평범한 남성이 보기에는 적어도 그랬다.

/허행윤 제2사회부장

© 경기일보(www.kyeonggi.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댓글 댓글 운영규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