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면서 보기에 몹시 역겨운 것 중 하나가 엄마가 어린 자녀를 때리는 모습이다. 우는 아이를 달래는 게 아니라 머리나 등을 계속 때리면서 울지 말라고 악을 쓰는 엄마의 얼굴을 보면 악마가 따로 없다. 악마 중에서도 가장 저주스러운 형상이다. 그것도 거리나 공원에서다. 어린 것이 무슨 큰 잘못을 했는지 모르겠으나 매질하는 것을 보면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엄마는 성큼 성큼 걸어가면서 서너살짜리 아이가 빨리 따라 오지 못한다고 손을 확 잡아 끄는 모습도 목불인견이다. 어린 아이의 팔이 빠져 나가지 않은 게 천만 다행이다. 한 번은 나이 지긋한 여성이 아이를 때리는 젊은 엄마에게 충고했다가 봉변 당하는 광경을 봤다. “내 새끼, 내가 야단치는 데 무슨 참견이냐”는 식이다. 학교를 다닐만큼 다녔을텐데 왜 그렇게 무례하고 무식한 지 도무지 모를 일이다.
혹자들은 말하기를 이혼, 부부싸움, 카드빚 등으로 인해 부모가 자녀를 학대한다고 하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그게 이유의 전부는 아니다. 원래 악하게 태어난 사람도 적지 않다. 지금보다 훨씬 가난하게 살던 시절에도 이 땅의 부모들은 자녀를 금쪽처럼 여겼다. 부모는 우물가에서 냉수로 허기를 채워도 자식들에게는 죽이라도 쑤어 먹였다.
근래 들어 부모들이 어린 자녀들을 학대하는 실태를 보면 엽기적이다. 걸핏하면 때리고, 버리고, 내쫓고, 죽인다. 끔찍하다. 중앙아동학대예방센터에 한해 5천건 가까이 신고되는 사례 중 70%가 친부모의 가해라는 사실에 경악을 금할 수 없다. 장소도 집안이 80%를 차지한다. 학대 받는 아동이 45만명을 넘는다. 신고 안 된 경우까지 추산하면 훨씬 더 많을 것이다.
며칠 전 고양시 도심 주택가 셋방에서 오물에 뒤범벅이 된 어린 삼남매(4, 3, 1세)가 발견됐다. 발견 당시 아이들이 지내던 5평 정도의 방안에는 대소변이 널브러져 있어 악취가 진동했다. 두 딸의 옷은 대변과 음식물로 뒤엉켜 있었다. 돌이 갓 지난 아들은 얼굴과 귀 부위가 심하게 곪은 채 침대와 벽 사이에 머리가 끼여 울다 지친 상태였다. 화장실은 변기가 막혀 파리가 들끓고 있었다. 우리에 갇혀 있는 동물이지 사람이 아니었다.
군포의 한 병원에 8세 딸과 6세 아들 남매가 실려 왔다. 딸은 병원 도착 즉시 숨을 거뒀고, 아들은 간 기능에 중대한 손상을 입고 중태에 빠졌다. 이틀 전, 남매의 새엄마는 남매가 놀다 집에 늦게 들어왔다는 이유로 주먹과 발로 마구 때렸다. 딸은 머리를 벽에 부딪힌 뒤 “엄마, 숨 쉬기가 힘들어”라며 울고 매달렸지만 새엄마는 집에 이틀이나 방치했다. 3년 전부터 남매와 같이 산 새엄마는 작년 5월에도 남매를 폭행하다 경찰에 입건돼 기소유예처분을 받았었다. 상습폭행에 시달리던 남매는 경찰의 ‘일시 보호’결정에 따라 한달 남짓 아동보호시설에서 지낸 뒤 집으로 돌아 갔다가 반년만에 변을 당했다. 폭행 당시 새엄마는 임신중으로 곧 엄마가 될 몸이었다.
인천에서 30대 엄마가 카드빚에 시달리다 세 자녀를 13층 아파트에서 내던진 후 자신도 투신한 자살, 이른바 ‘동반자살’이라는 것은 ‘명백한 살인’이다. 자살이 아니다. 작년 한해에만 부모가 자녀를 살해한 후 자살한 사건이 20건이다. 부모의 인격 결함에 27명의 어린 자녀가 참변을 당했다.
부모의 환경이 아무리 극한상황이라 하더라도 자녀를 학대하는 것은 잔혹한 범죄행위다. 수중에 돈 있을 때 부모 노릇은 누구든지 할 수 있다. 불행하게도 ”자녀를 자신의 소유물로 생각하지 말라”는 주문이 공허해졌다. 쓸모 없어졌다. 아동학대는 정말 더 이상 가정내 문제가 아니다. 야만적인 사회범죄로 엄중히 처벌돼야 한다.
사람들이 이렇게 말한다. “자식을 학대하려면 결혼을 하지 말라. 결혼하여도 자식을 생산하지 말라. 전처의 자식을 사랑할 자신이 없으면 결혼(재혼)하지 말라. 전남편의 자식을 사랑할 자신이 없으면 결혼(재혼)하지 말라.” 듣고 보니까 백번 옳은 소리다. 별 수 없다. 학대 받는 아동들은 못된 부모 슬하를 떠나 자립할 수 있도록 얼른 성장하는 게 최선의 길이다. 이런 생각밖에 할 수 없는 사회가 답답하고 원망스럽다.
/임병호.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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