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남북전쟁 당시 ‘최소한의 뉴스와 최대한의 정치’를 제공하던 ‘정치적 신문’들은 남북전쟁 내내 연방정부를 난처하게 만들었다. 남북전쟁에 반대하고 노예제도 폐지령을 격렬하게 비난하던 언론과, 노예제도 폐지에는 찬성하지만 그 범위와 방법, 시기를 둘러싸고 공격하는 전쟁 찬성 언론들이 대통령 링컨을 괴롭혔다. 그러나 링컨은 헌법에 보장된 언론의 자유를 존중하면서 남북전쟁에 대한 여론의 지지를 유지하기 위해 ‘어려운 균형잡기’에 노력했다.
정치가로서 링컨은 타고난 연설가였다. 농민과 노동자도 이해할 수 있는 친숙하고 일상적인 어투로 대중에게 호소력있게 다가섰다. 하지만 대규모 청중을 모으기 위해서는 연설을 보도해 줄 매스컴을 이용해야 한다는 현실에 적응했다.
링컨은 정치 초년병 시절부터 자신을 지지·반대하던 기자들과 편집자들을 친구나 동료로 만들었다. 1860년 2월 뉴욕의 쿠퍼유니언에서 ‘노예제도’폐지 연설을 끝내자 마자 그는 ‘뉴욕 트리뷴’지의 조판실을 찾아가 자신의 연설문이 제대로 실렸는 지 교정쇄를 직접 확인했다. 대통령이 된 후에도 링컨은 자신의 신임을 얻은 기자들과 기꺼이 대화를 나누었다. 때때로 기자들은 대통령에게 자신들이 알고자 하는 내용을 써놓은 쪽지를 보냈다. 링컨은 만약 질문이 범위를 넘어선 것이라면 응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주제가 자신의 주된 관심사라면 그 기자를 집무실로 불러 들이거나, 기자 대기실로 직접 가서 세부질문에 대답했다.
링컨이 남북전쟁 당시 공화당을 지지하는 ‘뉴욕 트리뷴’과 민주당 쪽 ‘뉴욕 헤럴드’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한 것은 가장 힘든 일이었다. 윌리엄 셔먼 장군은 비판기사를 써대는 ‘뉴욕 헤럴드’에 대해 “대통령이 ‘뉴욕 헤럴드’를 통치하지 않으면 ‘뉴욕 헤럴드’가 대통령을 통치할 것”이라고 경고하기도 했다. 그러나 ‘연방제 수호’에 정치적 생명을 걸었던 링컨은 반대세력이 주장하는 것을 알기 위해 ‘뉴욕 헤럴드’를 즐겨 읽었다. 링컨을 존경한다는 노무현 대통령이 참고해야 할 ‘링컨의 언론관’이다.
/임병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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