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1762~1836)은 22세(1783년)때 과거에 급제하여 75세에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53년의 파란만장한 공적(公的) 삶을 살았다. 53년 중 20년간을 유배생활로 보냈다. 그 중 18년간을 전남 강진 한 곳에서만 지냈다. 이 유배생활 중 다산은 많은 젊은이와 스승-제자의 인연을 맺었는데 황상(黃裳·1788~1863)이라는 제자와의 관계는 사제지간의 표상이었다.
강진 유배생활을 시작할 때 다산은 38세였다. 12세 황상이 다산을 찾아와 제자되기를 청했다. 매사에 자신(自信)이 부족하고 소극적이었던 황상을 다산은 잘 보살펴 주었다.
황상도 시골에서 보기 드문 다산의 진면목을 깊이 이해하고 그의 가르침을 실행에 옮겼다. 12세였던 황상은 30세에 이르고 다산은 56세의 노인이 됐다.
회갑을 몇년 앞두고 유배에서 풀려난 다산은 강진을 떠나 고향인 경기도 마재로 돌아왔다. 황상을 비롯한 강진의 제자들은 다산이 좋아하는 차(茶)를 매년 마재로 부쳐 보내곤 하였다.
다시 18년의 세월이 흘러 황상이 48세에 이르고 다산은 74세의 노인이 됐다. 황상은 스승 다산이 그리워 열흘을 걷는 긴 여행길에 올랐다. 18년 만에 스승과 제자는 해후의 기쁨을 만끽하고 황상은 귀향길에 올랐다.
그러나 귀향 중에 다산의 부음을 듣고 길을 되돌려 상을 치른 후 강진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10년 후 58세의 황상은 타계한 스승이 그리워 열흘 길을 걸어 다산의 생가를 다시 찾았다.
다산의 아들들은 이런 황상의 정성을 다하는 제자 모습에 감격하여 정씨(丁氏)와 황씨(黃氏), 두 가문의 계약을 맺었다.
“두 집안의 후손들은 대대로 신의를 맺고 우의를 다져갈 진저. 계(契)를 맺은 문서를 제군들에게 돌리노니 삶가 잃어버리지 말라.”고 하였다. 이를 후세사람들은 이른바 ‘정황계안(丁黃契案)이라고 불렀다.
스승과 제자 사이의 사랑과 감사가 부족한 오늘날 절실하게 생각 나는 다산과 황상 간의 전설같은 일화이다. 무릇 사제지간의 관계는 이래야 한다.
/임병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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