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건 국무총리가 노무현 대통령에게 사의를 표명한 지 열흘이 다 되도록 물러가지 못하고 있다. 대통령이 다음 총리를 지명하려면 제17대 국회 원구성이 6월2일경 가야 하는 일정상의 이유도 있긴 하다.
그러나 보다 더 큰 이유는 부분 개각에 있다. 부분 개각이 또 총리 지명보다 더 급박한 이유는 열린우리당의 사정이 그러한 데 있는 것 같다. 입각파에 대한 견제와 자리 다툼이 묘한 역학 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청와대는 이러므로 고 총리가 열린우리당의 입각파에 대한 (대통령의) 장관(국무위원) 임명을 위한 제청권을 빨리 행사해 줄 것을 기대하고 있으나 총리의 생각은 다른 것으로 관측된다. 총리는 이미 사의를 표명한 입장에서 제청권을 행사하는 것은 헌법정신에 위배된다는 입장을 밝힌 바가 있다.
고 총리는 흔히 ‘행정의 달인(達人)’이라는 말을 듣는다. 얼마전에는 행정의 시의 적정성을 강조하는 말로 “행정은 낚시의 타이밍과 같다”하여 화제를 뿌렸다. 다 맞는 말이지만 그를 돋보이게 하는 것은 원칙주의자라는 점이다. 원칙은 정수인 데 비해 변칙은 꼼수다. 대통령도 원칙이란 것을 많이 강조하지만 이런 청와대가 물러가는 총리더러 제청권을 행사해주길 바라는 것은 누가 보아도 꼼수인 변칙이다. 총리의 제청권이 비록 실권이 못되는 아무리 형식적인 것이라 하여도 그게 원칙이 아닌 것은 부인될 수가 없다.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텔레비전 화면에 비친 그를 보고 “안정감이 있어 보인다”는 말을 하는 이들이 많았다. 물론 그렇게 본 일부 사람들의 말이지만 그런 얘기가 파다했던 것은 원칙주의에 대한 신뢰다. 헌법재판소는 대통령 탄핵소추를 기각하면서도 ‘헌법 준수 의무에 노력해 줄 것’을 당부했다. 물러가는 총리에 대한 제청권 요구는 바로 이에 위배되는 것으로도 보아진다.
고건 국무총리가 마지막 순간까지 헌법정신의 원칙을 지킬 것인지 어쩔 것인지 그것이 주목된다./임양은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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