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엔 대남공작을 위해 1970년대에서 80년대에 납치해간 일본인들이 있다. 일본의 해안이나 제3국에서 북녘 사람들이 납치해 갔다.
2002년 9월 1차 북·일정상회담에서 김정일 위원장은 고이즈미 일본총리에게 이례적으로 이같은 사실을 시인했다. 납치 일인은 13명으로 이중 8명이 사망하고 5명이 생존해 있다며 사과까지 했다. 생존한 납치 일인들도 세월이 흘러 그곳에서 결혼을 했다. 이 가운데 3명이 1년7개월 전 북에서 일본에 있는 가족을 만나기 위해 귀국했다. 당초엔 다시 돌아가기로 됐으나 일본정부는 이들을 보내지 않았으며 본인들도 머물고 싶어 했다.
문제는 북에 있는 이들의 자녀 등 가족을 일본으로 데려가는 이산가족의 재결합이었다. 고이즈미 총리가 이를 위해 지난 22일 평양에 가서 2차 북·일 정상회담 끝에 그날로 5명을 비행기에 태우고 돌아갔다. 남편이 월북 미군이어서 북을 떠나면 재판받을 것을 걱정해 고이즈미와 동행을 거부한 미국인 남편과 자녀들을 제외한 나머지 납치 일인 가족들이 돌아오던 날 NHK방송은 진종일 시시각각으로 생중계했다. 신문들은 호외를 찍어 내기에 바빴다.
불과 1개월여 전 이라크 저항세력에 의해 일본이 3명이 납치됐을 때의 분위기와는 아주 판이하였다. 이라크에서 자위대 철군을 요구하며 인질의 목숨을 위협하는 데도 일본 정부는 해볼테면 해보라는 식으로 철저히 외면했다. 일본 국민들도 공연한 여행을 하여 나라에 부담을 끼친다며 인질들을 나무랐다. 인질들은 나중에 억류가 풀려 귀국하고서도 죄인처럼 고개를 들지 못했다.
이라크 인질과는 달리 언론의 스폿라이트를 받으며 돌아온 납치 일본인 자녀 5명은 그냥 귀국한게 아니다. 쌀 25만t과 의약품 1천만달러 상당을 북에 지원하기로 하고 데려왔다.
그러나 고이즈미 총리는 이들을 데려오고도 혼났다. 평양에서 귀국한 당일 밤 회담 결과를 설명하는 자리에서 돌아오지 못한 피랍자 가족들로부터 “아직도 의혹이 짙은 피랍자 10명에 대한 문제는 왜 더 따지지 못했느냐”며 호되게 몰아 붙였고 고이즈미는 입을 꾹 다문채 그같은 질책을 조용히 듣기만 했다./임양은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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