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순조 연간에 남종현(南鍾鉉·1783~1840)이란 빈한한 서당 훈장이 쓴 ‘도둑맞은 내력’이란 산문이 있다. 1794년에서 1832년까지 서울 월암동에서 38년간 살며 스무 번을 도둑맞은 이야기다.
이런 대목이 있다. “이 해 도둑이 앞마당에 들어와 무명 열댓 근과 햇볕에 말리려고 걸어둔 빨래 여덟~아홉 벌을 가져갔다. 그해 겨울, 추위에 떠느라 죽을뻔 했다. 을묘년(1796)에 도둑이 사랑채에 들어와 요강과 책 몇권을 훔쳐 달아났다. 경오년(1810)에 도둑이 부엌에 들어와 솥 두개를 파갔는데 뒤를 밟아 보니 이웃사람이었다. 을해년(1815) 도둑이 사랑채에 들어와 서적 4권과 송곳, 칼, 가죽신발 등속을 훔쳐갔다. 신사년(1821)에 도둑이 안채 동쪽방에 들어와 식기, 그릇, 의복을 훔쳐 달아났다. 이 해에 도둑이 아랫방에 들어와 흰 천을 뜯어갔다. 임오년(1822)에는 도둑이 사랑채에 들어 서적 열두 권을 훔쳐 갔는데 태반이 남에게 빌린 것이었다.”
‘치졸하고도 야박한 좀도둑’이 가난한 훈장의 세간을 야금야금 들어낸 것이다. 빨래, 서책, 요강, 솥, 톱, 송곳 등등 세간살이는 당시에 의식주를 해결하는 데 긴요한 것들이었다. 심지어는 “임진년(1832)에 도둑이 바깥 문에 들어와 쇠로 만든 문고리를 떼어갔다”는 얘기도 썼다.
요즘 도둑들도 ‘금붙이’만 훔쳐가는 게 아니다. 고철 모으는 일도 바닥이 나 하루 하루 끼니 잇기조차 힘겨워 남의 집 ‘압력밥솥’등 살림도구를 훔치는 이른바 ‘생계형 범죄’가 급증하고 있다. 일하는 날보다 공치는 날이 훨씬 많은 데다 경기침체로 먹고 사는 게 힘든 가정이 많아지면서 춥고 배고프던 1960~70년대 시절의 범죄 양상이 번지고 있는 것이다.
2003년도 한해 동안 도내에서 검거된 강·절도 사범이 9천900여명으로 월평균 820명이었는데 올 들어서는 월평균 980명 수준으로 늘었다.
이렇게 생계형 범죄가 급증하는데도 정부는 경제가 위기상황은 아니라고 태평스럽게 말한다. 고급관저 안에서 호의호식하니까 정말 보이는 게 없는 모양이다.
/임병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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