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매일 매일 방사선과 더불어 살고 있다. 우리가 사는 집, TV, 전자레인지, 담배, 맥주, 마시는 물, 병원의 X선, 도시가스, 안경테, 포장도로, 틀니 등등에서 아주 적은 양이지만 방사선이 나온다. 또 하늘에서, 땅에서, 공중에서, 심지어는 우리 몸에서도 방사선이 나온다. 그래도 우리가 아무 이상없이 건강하게 살고 있는 것은 이들에게서 나오는 방사선 양이 매우 적기 때문이다.
원자력발전소나 원전수거물관리시설에서 나올 수 있는 방사선 양은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받고 있는 방사선 양보다도 적다. 방사선은 결코 두려운 존재가 아니다. 오히려 방사선을 잘 관리하고 활용한다면 우리의 삶은 더욱 윤택해질 수 있다.
정부가 건설하려는 원전수거물관리시설(원전센터)만 해도 그렇다. 건설예정지역 주민들이 찬반논란을 거듭하고 있는 것은 원자력에 대한 잘못된 상식때문이다. ‘원전수거물’은 방사성 폐기물의 대체용어다. 원자력발전소의 운전원이나 보수요원이 사용했던 장갑, 작업복, 가운, 걸레, 각종 교체부품 그리고 방사선동위원소를 사용하는 산업체, 병원, 연구기관 등에서 나오는 주사기, 시약병, 폐품 등을 말한다.
방사선은 일종의 전자파와 같은 것으로서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방사선 계측기로 측정이 가능하고 물리적으로 얼마든지 차단할 수 있다. 다량의 방사선을 일시에 받으면 인체에 유해한 것은 사실이지만 일정 수준 이하에서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우리가 건강진단을 받기 위해 별 거부감 없이 X선 촬영을 받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원전수거물 관리시설에서 나올 수 있는 방사선의 양은 연간 0.01밀리시버트도 채 안된다. 이 정도는 X선 촬영 때 받는 양의 수십 분의 1 수준에 불과하다. 또 원자력시설과 상관 없이 지구상에 사는 사람이면 누구나가 받게 되는 자연방사선 양의 240분의 1 수준에 불과하다. 그러니까 “원전수거물은 죽음의 재이며 치명적인 방사선을 내 뿜는다”는 주장은 당치 않은 것으로 인식해야 한다. 우리 나라는 현재 원전수거물을 원자력발전소 부지 내의 저장실에서 20년 넘게 관리해오고 있는 중이다. 외국에서는 여러 나라들이 오래 전부터 원전수거물 관리시설을 건설하여 안전하게 운영하고 있다.
원전수거물이 죽음의 재이고 치명적인 방사선을 내 뿜는다면 부산시 기장군, 경북 경주시, 전남 영광군, 경북 울진군 등 4개 지역 우리 나라 원전 주변은 물론 외국의 원전수거물 관리시설 주변도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 돼야 할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한국원자력문화재단의 후원으로 한국유네스코 경기도협회가 작년에 울진원자력발전소를 방문한 데 이어 올해 경기도 교육삼락회(전직 학교 교장 및 교육장 단체)가 월성원자력발전소를 찾은 일은 원전수거물에 대한 왜곡을 해결해 준 계기가 되었다. 정부가 원전센터를 건설하려는 것은 고리·월성·영광·울진원자력발전소 부지 내에 보관 중인 원전수거물을 한 곳에서 집중관리하기 위해서다. 지난 5월 31일 마감한 원전센터 유치 재공고에 10개 지역이 신청한 것은 그동안 원전센터에 대한 인식이 크게 달라진 것으로 실로 다행이다.
인류는 여러 형태의 에너지 개발을 통해 문명의 꽃을 피워 왔다. 따라서 에너지 없이는 단 하루도 살 수 없다. 특히 자원이 부족한 우리 나라의 경우 에너지 자립은 국운을 걸고 해결해야 할 중대한 과제다.
원자력은 우리나라의 경제성장에 커다란 역할을 해 왔다. 지금은 이러한 원자력의 이용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원전수거물을 안전하게 종합관리하기 위한 합리적인 선택이 절실히 필요한 때다.
핵무기를 갖고 있거나 개발 중인 강대국에서 반핵운동이 많은 지지를 받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원자력의 평화적인 이용까지 무턱대고 반대해서는 안된다. 특히 에너지원의 97% 이상을 수입하는 우리 나라로서는 원자력이 가장 현실적인 에너지원이기도 하다.
아무런 대안도 없는 무조건적인 반대는 옳은 방법이 아니다. 정부도 찬반갈등으로 엄청난 소요사태를 빚었던 부안사태를 타산지석으로 삼아 ‘밀어붙이기식 부지 선정’을 해서는 더 더욱 안된다. 해당 지역주민의 동의와 신뢰 속에서 투명하게 추진해야 한다. 한국원자력문화재단의 대국민 홍보활동도 원전센터 건립의 기틀이 된다.
/임병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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