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 장군은 원래 육군장교였다. 당시는 육군과 해군의 개념 구분이 없었다. 이순신은 함경도에서 여진족과 대치하다가 조정의 명령에 의해 수군(해군)지휘관으로 발령받은 청년장교였다. 임진왜란 때 ‘상유십이 순신불사(尙有十二 舜臣不死·아직 제게는 배가 열 두척이 있고, 순신은 아직 죽지 않았습니다)’라는 장계를 올린 이순신은 확실한 영웅이었다. 하지만 갈등과 번민이 매우 많은 억눌린 내면을 가진 평범한 인간이기도 했다. 이순신이 이끌었던 부대가 원래 군졸들이 용기와 충심으로 가득 차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지는 않았다. ‘난중일기’를 보면 그들은 민간인 마을의 개를 잡아 먹고, 군무를 이탈하고, 군수품을 빼돌리기도 했다.
이순신의 위대함은 그가 ‘바다’라는 사실에만 입각해 살고 죽었다는 데 있다. 임진왜란 발발 전, 조정의 명령에 의해 일본으로 잠입해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만나고 온 밀사가 있었다. 그들은 각자의 당파성의 관점에서 도요토미를 봤다. 한 사람은 도요토미의 눈깔이 늑대같다고 했고, 또 한 사람은 영웅같다고 하였다. 결국 당파성에 매몰된 조정은 현실을 제대로 볼 수 없었고, 어느 당파에도 속하지 않은 이순신은 오직 바다를 통해서 현실을 봤다. 사색당쟁에 빠져 있던 조선 조정이 이순신을 두려워해 제거하려한 것은 그가 어느 누구의 ‘자기네 편’도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4·15 총선 때 정치인들이 이순신의 장계 ‘상유십이 순신불사’를 애용한 것은 누란의 위기에서 한 나라를 구했던 ‘강인한 남성상에 대한 향수’라고 할 수 있다.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는 “충무공의 비장한 각오로 이 자리에 섰다”고 했고, 추미애 당시 민주당 선대위원장은 “이순신 장군처럼 민주당을 일으켜 세우겠다”고 말했었다.
그런데 요즈음은 ‘이순신 장군’이 새로운 문화코드로 부활하고 있다. 1970년대 국가와 민족에 절대적 충성을 바친 영웅으로서 화려한 조명을 받았던 이순신이 고뇌하는 평범한 인간, 개혁정치의 표상, ‘불패신화’를 이룩한 리더십의 화신으로 소설·드라마·오페라·만화 등에서 다시 태어나고 있는 것이다. 영웅 이순신이 영생하는 것은 우리 겨레의 축복이다.
/임병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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