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유화’

조선 숙종 28년(1702) 경상도 선산부 상형곡(현 경북 구미시 형곡동)에서 양인(良人) 출신의 한 여인이 자살한 사건이 있었다. 어렸을 때 어머니를 잃고 계모의 슬하에서 자란 향랑(香娘)이란 이 여인은 17세에 한 마을에 사는 14세의 칠봉에게 출가했다. 남편은 외도를 하면서 그녀에게 폭력을 휘둘렀고, 향랑은 결국 3년 만에 이혼을 하고 친정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친정 부모는 그녀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숙부에게 찾아가 의탁했지만 숙부도 얼마 후 그녀에게 개가를 종용했다. 향랑은 하는 수 없이 다시 시댁을 찾아 갔다. 그러나 남편의 횡포가 여전해 시아버지까지 개가를 권유했다. 오갈 데 없는 처지가 된 그녀는 낙동강의 지류인 오태강으로 가서 나무하는 한 소녀를 만나 자신의 기구한 인생사를 이야기하고 ‘산유화(山有花)’란 노래를 부른 뒤 강물에 몸을 던졌다.

이 사건을 보고 받은 선산부사는 향랑이 절의를 지키기 위해 자결했다며 조정에 추천했다. 2년 뒤에 임금은 향랑을 ‘정녀(貞女)’라 부르고 그 무덤 옆에 비석을 세우도록 했다. 열녀로 세상에 널리 알려진 향랑의 생애는 18, 19세기 문인들의 전(傳), 한시, 소설, 잡록 등 20여 편의 작품으로 기록됐다. 향랑의 무덤은 현재 구미시 형곡동 산 21번지에 있는데 그녀가 자결한 음력 9월6일이면 매년 묘 앞에서 묘제(墓祭)가 열린다.

그러나 향랑은 무조건 남편에게 순종했던 여인이 아니다. 현실을 억척스럽게 살아낸 여인이다. 외도를 하며 폭력까지 일삼는 남편과 맞서다가 이혼을 한 뒤, 이혼한 여자를 천시하는 풍습이 자리잡아 가던 18세기 초 조선의 현실에서 어쩔 수 없이 자살을 택한 희생자다.

“하늘은 어이하여 높고 멀며/ 땅은 어이하여 넓고도 아득한가 / 천지가 비록 크다 하나 / 이 한 몸 의탁할 곳이 없구나 / 차라리 이 강물에 빠져 / 물고기 배에 장사 지내리”. 향랑이 오태강에 몸을 던지기 전에 부른 노래 ‘산유화’다./임병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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