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정약용 형제의 비극은 남인 집안에서 태어난 것에서 비롯됐다. 아버지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몬 노론과 맞섰던 정조(조선조 22대 왕)의 총애를 받았다는 이유로 노론 벽파는 수십년 동안 다산의 둘째형 손암 정약전까지 싸잡아 공격했다. 다산, 손암 두 형제는 비록 천주교를 나중에 버렸어도 정적들은 이들에게 평생 천주교신자라는 음해를 뒤집어 씌웠다. 매형 이승훈과 정약종, 정약종의 장남 철상은 천주교 신앙을 지키며 같은 날 목숨을 잃었다. 정약종의 부인과 둘째아들 하상, 딸도 아버지의 뒤를 이어 사형당했다. 형제들 보다 늦게 천주교에 귀의했던 다산의 셋째형 정약종(가톨릭 세레명 아우구스티노)은 유일하게 신앙을 버리지 않았다. 그는 “땅을 내려다보며 죽는 것 보다 하늘을 우러러 죽는 것이 더 낫다”며 하늘을 보고 형틀에 누워 칼을 받았다. 망나니가 오히려 혼이 빠져 목이 반쯤밖에 잘리지 않았을 정도였다. 한국 천주교사에 길이 남을 순교다.
정약종이 목이 잘린 이틀 뒤에 정약전과 정약용은 유배길에 올랐다. 유배 중 정약전은 아들 학초의 죽음을, 정약용은 둘째 며느리의 죽음을 전해 들었다.
그러나 정씨 형제는 결코 세상을 저주하지도, 포기하지도 않았다. 정약용은 학문에 매진해 ‘다산학’이라 불리는 거대한 업적을 쌓았고, 형 정약전은 유배지 민중들과 어울리며 ‘자산어보’와 ‘송정사의’같은 명저를 남겼다.
귀양 16년째 마침내 정약전이 세상을 떠났고, 정약용은 18년만에 유배에서 풀렸으나 그의 형제 동기는 누구도 남아있지 않았다. 귀향 후 정약용은 가족들과 벗, 동지들의 묘지명(墓誌銘) 저술에 힘을 기울였다.
억울하게 죽거나 귀양갔던 이들에게 바친 다산의 묘지명은 동지들의 무죄를 세상에 알리는 진혼굿이었다. 한국천주교사이기도 한 정약용 형제들의 생애는 열린 사회를 지향했다는 이유로 비참하게 죽어갔다.
지금은 비록 역사적 존경을 받고 있지만 살아 생전 그들처럼 핍박과 저주를 받았던 비운의 형제도 없었다. 개혁이 어려운 것은 기득층의 반발이 가장 큰 이유임을 정약용 형제의 생애가 여실히 말해 준다.
/임병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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