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향(轉向)’이란 말은 원래 일본의 사상검사들이 후쿠모토 가즈오의 ‘방향전환론’에서 따온 말로 대표적인 일제 잔재다. 우리 나라의 사회주의 운동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일제의 패전 이후 일본에서는 사라졌지만 우리 나라에서는 이승만 시대를 거쳐 박정희 대통령 집권기간에 절정에 달했다. 박 정권의 전향공작이 본격화한 것은 1973년 6월 전국의 교도소에 사상전향공작반이 투입되면서부터였다.
비전향 장기수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 중반께 부터였다. 그때까지 비전향 장기수의 존재를 아는 사람은 드물었고, 알고 있어도 절대 말할 수 없는 일종의 비밀이었다.
장기수들은 6·25전쟁 때 빨치산으로 활동하다 체포된 사람들, 남파 간첩들, 통혁당·인혁당·남민전·구미유학생 간첩단 사건 등 자생적 변혁운동이나 시국사건 관련자들, 납북 어부들이나 재일교포 간첩단 사건에 얽힌 사람들 등 크게 네 부류로 나누었다. 이들 가운데 빨치산 출신들은 1989년 사회안전법 폐지로 모두 출소했기 때문에 30년 이상의 초장기수들은 대개 남파 간첩 출신이다. 분단 이후 비전향 장기수 가운데 출소 이후 사망자를 포함한 총 94명이 산 징역 햇수를 합하면 모두 2천854년, 한 사람 평균 31년이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 이전까지만 해도 대다수 언론들은 비전향 장기수를 미전향 장기수로 불렀다. 미전향은 아직 전향을 하지는 않았지만 언젠가는 전향을 시켜야 할 공작대상이라는 뜻이 내포돼 있다.
전향공작 과정에서 인권이 유린된 것은 사실이지만 이번에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전향공작에 저항하다 숨진 남파 간첩·빨치산 출신 3명을 ‘민주화운동 의문사’로 인정한 것은 아무래도 석연치 않다. 그들이 신봉했던 기치는 공산주의이고 타도대상은 민주주의(남한)였다. 그들은 민주주의를 부정하고 전복시키기 위해 목숨을 버린 공산주의자다. 공산주의 혁명투쟁의 일환으로 전향을 거부한 것이다. 그들이 민주화 인사라면 김일성과 김정일은 민주화 운동의 대부라는 논리다. 의문사위원 7명 중 그들을 민주화 인사로 인정한 4명의 생각이 실로 난해하다.
/임병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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