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파

북이 해방후 친일파를 일제히 청산할 수 있었던 것은 단원화사회였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공산주의 체제에서 당(로동당)의 명령이면 하지 못할 일이 없다. 프랑스가 2차대전 후 다원화사회이면서 나치협력자, 이를테면 친독파를 숙청할 수 있었던 것은 공산주의와의 싸움이 없었으므로 깨끗이 청산할 수가 있었다.

남에서는 그러하지 못했다. 북처럼 단원화사회가 아닌 다원화사회인데다가, 또 프랑스처럼 종전후 평화를 구가하지 못하고 건국과정이 반탁운동 등 공산주의와의 싸움으로 일관하였기 때문이다. 해방후 처음엔 배척됐던 친일파가 첫 기용된 것은 일제시 고등계(정보계) 형사간부를 지낸 노덕술이었다. 남로당 등을 비롯한 공산주의자들의 극렬테러에 경찰 경험이 없는 당시의 치안 능력으로는 감당키가 어려워 노를 서울경찰청 사찰과장(정보과장)으로 기용한 것이 친일경찰의 출세길이 되었다. 경찰의 친일파 기용이 또 계기가 되어 군대에 이어 행정·사법분야에 까지 확대된 것이 이른바 오늘날 문제가 된 친일파 미청산이다.

이승만 초대 대통령은 친일파를 기용하긴 했으나 그의 재임시엔 일본과의 국교정상화란 말도 끄집어 내지 못하게 했을만큼 일본쪽엔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 그러한 그가 친일파를 특히 경찰과 군대에서 중용한 것은 당장 발등의 불이 된 대공 투쟁이 급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결국 이렇다 보니 친일파 청산을 위한 반민특위가 유야무야하게 끝나고 말았다.

해방후 친일파를 청산하지 못한 잘못엔 이런 시대적 배경이 있다. 다만 전후 세대는 해방후 공산주의자들의 관공서 습격, 살인 방화 약탈 등이 얼마나 극렬했는가를 잘 몰라 이해가 안갈지 모르겠으나 건국을 끈질기게 방해했던 기록은 많고 아직도 당시 세대의 인물들이 상당수 생존해 있다. 국회에서 친일파 문제를 거론하는 것은 나쁘다 할 수 없으나 해방된지 이미 60년이 다 되다보니 일제시 직명이나 행위만을 가지고는 참으로 옥석을 가리기가 어렵게 됐다. 지지대子도 초등학생이었던 일제치하에서 창씨개명을 했고 ‘덴노헤이카 반사이’(천황폐하 만세)를 불렀으므로./임양은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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