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교산의 아침/지방의회 초심으로 돌아가라

요즘 국회의원들에 이어 생활정치, 또는 요즘 흔한 표현으로 상생정치의 초병이어야 할 지방의회들이 닮지 말아야 할 기성 정치인들의 샅바싸움을 모방하는 사태를 지켜 보는 심정은 차라리 곤혹스럽다.

그래도 아직까지 상당수 민초들은 ‘그래도 지방의회는 때가 덜 묻고 순박하고 잔머리를 돌리진 않겠느냐’고 생각하고 있다. 사실은 그 점이 더 문제인듯 싶다. 세상도 변했고 지방의원들도 적당히 때가 묻었는데도 말이다. 지방의회가 30여년만에 부활했을 당시만 해도 적어도 이같은 속설은 맞는 얘기였다.

13년 전 초여름 오후 하남시 모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시작된 지방의회선거 전국 최초 합동연설회장이 생각난다.

컴퓨터나 인터넷 등이 세상에 나오기 전인, 그야말로 호랑이 담배 피우던(?) 아날로그시대였었다. 지금도 별로 달라진 게 없지만 당시 연설회가 열린 학교 주변은 그린벨트로 논이나 밭, 또는 비닐하우스 투성이여서 운동장으로 몰려 든 청중들은 대부분 농민들이었다. 밀짚모자를 눌러 쓴 촌부에 수건을 머리에 두른 아낙네들 사이로 얼굴이 새까맣게 탄 코흘리개들도 끼어 있었다.

더구나 수십년만에 처음으로 지방의원을 뽑는 연설회인데다 전국에서 처음으로 열리는 자리여서 방송사 중계차량들이 즐비하게 시골학교 운동장으로 모여 들었으니 시골 한적한 마을의 구경거리치고는 시쳇말로 ‘짱’이었다.

연단에 나온 후보들도 긴장했었다. 머리를 빗고 가리마를 타고 기름도 발랐지만 촌스러움을 가릴 순 없었던 그들이 사자후를 토한 연설의 주된 내용은 ‘주민들을 위한 지방자치’였었다. 한마디로 프로들이 아니라 순수한 아마추어였었다. 후보들이 내건 공약도 거창한 게 아니라 마을회관을 새로 짓고 마을 안길을 넓히고 TV가 잘 나오지 않는 난시청지역을 해결해주겠다는, 뭐 그런 내용들이었다.

당시 풋내기였던 기자는 설레는 가슴을 애써 누르며 후보들이 제시하는 공약과 뚫어져라 쳐다 보는 인심 좋은 청중들의 반응을 스케치하느라 분주했었다. 진지하게 연단을 응시하고 후보 정견 발표에 귀를 기울이던 모습들이 참 순박했었다.

그렇게 시작했던 지방자치였었다. 그런데 요즘 지방의회를 보면 웬지 미덥지 못한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후반기 의장단선거를 놓고 계파간 정파간 다툼이 심화되고 있는 탓인가.

더구나 모 지방의회는 주민투표 관련 조례(안) 심의문제를 둘러 싸고 주민투표 청구인수를 행정자치부 권고안보다 더 많게 규정한 집행부 안을 그대로 통과시켜 말썽을 빚고 있다. 정부가 주민투표를 활성화하겠다고 발표하고 행정자치부가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권고안을 만들었는데 정작 주민투표를 현실화하는데 앞장 서야 할 지방의회가 오히려 행정자치부 권고안보다 청구인수를 늘린 행위 자체를 놓고 보면 과연 지방의회가 어디로 흘러 가고 있는지 혼돈된다.

주민투표 청구도 따지고 보면 지방자치의 요체다. 지방자치단체가 시행하는 행정이 잘못됐거나 하다 못해 마을 인근에 쓰레기소각장같은 주민들의 의견에 반하는 시설들이 건립되는 사안에 대해 주민들의 반대여론이 거세지면 투표로 의견을 물을 수도 있고, 단체장이 섣불리 독단적으로 행정을 펼칠 기미가 있으면 주민들의 이름으로 쐐기를 박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지방의회가 13년 전 초심으로 되돌아 갈 순 없을까.

/허행윤 제2사회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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