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 武將이 우리들 앞에

발해(渤海)는 고구려 유민 대조영(大祚榮)이 699년에 건국했다. 만주 송화강 이남과 고구려의 옛 영토를 거의 확보하면서 찬란한 문화를 이루어 해동성국(海東聖國)으로 불렸다.

블라디보스토크 등 러시아 연해주까지 영토를 넓혔다. 도읍은 대조영이 돈화(敦化)에서 세를 얻어 나라를 세운후 3대 문왕이 지금의 흑룡강성 영안현 동경성인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로 옮겼다. 건국 227년만인 926년 거란족 요(遼)나라에게 망하면서 한국사는 중국 대륙에서 밀려났다. 발해는 고구려에 이어 중국 대륙의 역사를 장식한 한국사의 마지막 자긍심인 것이다. 국내 학계의 발해사 연구가 미흡한 것은 유감이다. 중국과 러시아 땅이 돼버려 현지 답사에 어려운 점이 많은 게 연구가 미흡한 원인이긴 하다. 이 바람에 중국은 고구려와 더불어 발해도 자기네 역사의 지방정권이라고 우긴다. 심지어는 러시아도 심포지엄을 갖는 등 발해사 연구에 관심이 대단하다.

러시아 연해주 우수리스크 부근의 ‘체르나치노 5’ 발해 고분 유적 발굴조사에서 30대 남자의 발해 무장(武將) 전신 유골이 나왔다는 보도는 참으로 소중한 낭보다. 한·러공동발굴조사단의 우리측 단장은 정석배 한국전통문화학교 교수다.

방사선 탄소연대 측정결과 830~840년의 사람으로 밝혀진 이 발해 무장은 엉덩이와 정강이에 화살촉과 창끝 부분이 발견된 것으로 미루어 전사한 것으로 학계는 추정하고 있다. 갑옷 조각과 창검 등도 함께 발굴된 전신유골의 발해 무장은 1천200여년만에 우리 앞에 성큼 다가선 것이다.

신라의 삼국통일은 한국사의 국토를 청천강 이남으로 좁혀 민족사관으로는 불행이다. 지금의 압록강과 두만강이 중국과의 국경이 된 것은 조선시대 들어 육진(六鎭) 개척 등을 한 이후다.

소설이든 텔레비전 드라마든 영화든 작가들이 중국 대륙을 무대로 했던 고구려나 발해의 웅대한 역사를 작품화하는 것을 좀처럼 보기가 어렵다. 근래에는 여류소설가 이기담씨의 노작으로 고구려와 백제 건국의 어머니 역할을 한 실존여걸 소재의 ‘소서노’(召西奴)만을 볼 수 있을 뿐이다.

/임양은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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