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사는 학계, 정치권은 미래사 힘쓰라

신기남 열린우리당 의장의 선친이 일제 때 한국인 징병 독려를 일삼은 일본군 헌병 ‘고초’(伍長·하사)라는 사실이 신 의장과 연좌될 수는 없다. 다만 집안의 불행한 과거를 숨긴 것은 정치적 도의에 어긋나지만 그도 역시 범부의 인간이었던 것 같다.

초등학생들에게 학교에서 조선말을 쓰면 친구 아이들더러 보자기 씌우기로 머리에 뭇매질을 하도록 한 것이 일제의 식민지 정책이었다. 일상생활에까지 일제영합을 강요하는 갖가지 수단을 참으로 악랄하게 썼다. 그 치하에 숨쉬고 살면서 조금이라도 친일하지 않고는 배겨나기 어렵게 만든 것이 일제다.

사실이 이렇기는 하나 과거 청산을 위해 적극적으로 가담한 친일행위를 밝혀내자는 것을 모르진 않는다. 그러나 문제는 광복직후가 아닌 60년이 다 된 이제와서 이분법적 논리로 규명하기엔 사실상 어려움이 많은데 있다.

과거청산을 말하자면 친일 말고도 또 있다. 민주화운동의 탄압만이 아니다. 6·25한국전쟁을 일으킨 북측 도발행위도 규명해야 하고 좌우익을 망라한 전쟁 중 양민학살이나 인공치하의 부역행위 또한 마땅히 가려내야 한다. 그러나 전쟁 도발의 책임 규명은 남북관계로 보아 시기가 아니다. 부역행위는 친·인척간에 안걸리는 집안이 거의 없다. 현대사는 이토록 얽히고 설킨 불행한 상처투성이의 이면을 안고 있다.

신 의장의 선친인 신상묵씨는 한국전쟁 중 당시 경무관으로 서남지구전투사령부 사령관을 맡았었다. 그가 지리산을 무대 삼은 남로당 이현상 총사령관 휘하의 공비 토벌로 지리산 주변의 영호남에 평화를 가져온 건 틀림없는 사실이다. 신 의장이 일본 헌병을 지낸 선친의 일로 어떤 정치적 처신을 취하든 그것은 본인의 임의에 속한다. 그러나 정치권이 이를 정치적 공략의 호재로 삼는 것은 적절치 않다.

노무현 대통령이 주장한 과거사 진실규명을 제대로 하려면 국회같은 정치권에서는 안된다. 정치적 규명은 정치적 왜곡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역사학자들 중심의 학계 전문기구를 두어 이도 수년간에 걸친 엄정한 조사분석이 객관적 기준으로 이뤄져야 한다. 과거사 규명은 학계에 맡기고 정치권은 미래사 개척에 분발해야 민중은 희망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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