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나라 대중목욕의 전통은 신라시대부터 있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집 밖에서 한 목욕’에 대한 가장 오래된 국내기록으로 동천과 북천에서 각각 목욕했다는 신라시조 박혁거세와 왕비 알영의 이야기를 꼽는다. 신라시대 땐 대형 공중목욕탕이 절에 있었다는 기록도 있다.
고구려에서는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에 ‘사천왕 17년(286년)에 왕의 동생들이 온탕에 가서 무리들과 어울려 유락을 즐겼다’는 기록이 있다. 고려인들은 목욕을 더 자주해 중국 송나라 문신 서긍이 고려에서 보고 들은 일을 기록한 ‘고려도경’에 ‘고려인들이 하루에 서너차례 어울려 목욕을 했다는 기록도 나온다.
조선시대에에 계곡과 냇가에서 노출을 꺼리는 생활관습 때문에 남녀 모두 옷을 입은 채 신체의 일부분을 씻는 방식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혜원 신윤복의 풍속화 ‘단오풍정’등에 나타나 있다.
1910년 이후 선교사들이 드나들면서 욕실을 부대시설로 갖춘 호텔과 여관이 생기기 시작했으며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들어오면서 대중목욕탕이 본격적으로 발전했다. 근대적 형태의 대중목욕탕은 1924년 평양에서 첫선을 보였고 행정관청인 부(府)에서 직접 관리를 맡았다. 서울에서는 1925년에 첫 대중목욕탕이 문을 열었고 1945년 이후 사설 대중목욕탕이 급속히 보급됐다.
2001년엔 1만98개로 최고에 달했지만 대형 사우나 찜질방이 급증하면서 대중목욕탕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1980년대 후반부터 목욕탕이 욕탕 중심에서 한증실 중심으로 바뀐 데다 아파트가 늘어나 굳이 목욕탕을 이용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요즘은 고유가와 업소간 가격경쟁이 치열한 데다 비수기까지 겹쳐 동네 목욕탕이 고사위기에 처했다고 한다. 설이나 추석 전날이면 연례행사처럼 대중목욕탕에 가서 묵은 때를 벗기던 옛날이 그리워진다.
/임병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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