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겁게 달아오르는 더위를 사위는 푸른 비가 촉촉이 내리고 있다. 이 비 그치면 서늘한 가을 바람 찾아오겠지, 시원한 편지 같은.
“저희 가족의 도보여행은 잘 마쳤습니다. 처음 시작할 때 이번 여행의 의미를 딱히 두지는 않았지만 아이들과 함께 걷는다는 그 자체로 이미 여행의 목적은 달성되었다고 여겨집니다…. 여행 마지막 날이라 생각하니 새삼 의욕이 솟고 덩달아 아이들의 얼굴에도 화색이 돕니다.
모래재 정상 마루터에 올라서자 커다란 달이 두둥실 떠 있었습니다. ‘아빠, 달이 참 아름다워요’, 무심결에 다빈이 입에서 나온 말입니다. 차를 타고 휑 지나다보면 느낄 수 없지만 걸으면서 바라보는 자연은 이렇게 우리에게 새로운 감동을 선사하나 봅니다”.
광릉 숲 근처에서 ‘민들레 울’이라는 문화카페를 재밌게 일구어 가는 다빈이 아빠가 연필로 써서 푸근한 한지 봉투에 넣어 보낸 편지의 한 대목이다.
폭염에 시달리던 어느 날, 한 여름나그네 가족이 들이 닥쳤다. 성서에 아브라함이 더위와 피곤에 지친 한 나그네 일행을 부지중에 맞아들인 것이 천사를 대접한 것이 되어 수지를 톡톡히 본 이야기가 생각나서 일단 흔쾌히 맞아들였다. 내 욕심은 적중하였다.
그들은 여름방학을 이용해 도보여행을 하고 있었다. 탁발수행처럼 하늘에 모든 것을 맡기고 정처없이 걷다가 몸을 누이고 계곡이나 산사에서 더위를 식히면서 걷고 또 걷고 있었다. 그러면서 만나는 꽃과 새와 들판과 숲, 해와 별과 달, 그리고 정 깊은 사람들을 통해 신의 창조 신비와 아름다움을, 몸의 행복을 느끼고 있었다.
늦은 밤까지 여름 나그네, 다빈이네 가족과 이야기를 나누는 가운데 나는 그들 속에 있는 ‘작고 소박한 자유와 행복’을 선물로 받았다.
다비드 르 부르통이 쓴 ‘걷기 예찬’이라는 책에 이런 글이 있다. “걷는 것은 자신을 세계로 열어놓는 것이다. 발로, 다리로, 몸으로 걸으면서 인간은 자신의 실존에 대한 행복한 감정을 되찾는다. 발로 걸어가는 인간은 모든 감각기관의 모공을 활짝 열어주는 능동적 형식의 명상에 빠져든다. 그 명상에서 돌아올 때면 가끔 사람이 달라져서 당장의 삶을 지배하는 다급한 일에 매달리기보다는 시간을 그윽하게 즐기는 경향을 보인다. 걷는다는 것은 잠시동안 혹은 오랫동안 자신의 몸으로 사는 것이다.”
현대인들은 자신의 몸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자동차로 살고 돈으로 산다. 우리를 낳은 어머니 대지로부터 멀어지고, 몸으로부터 멀어진 인간은 결국 그 존재의 기반이 무너질 수밖에 없다. 몸은 이 푸르른 대지를 걷는 것을 좋아한다. 걸을 때 몸의 행복을 느끼고 온 세상의 아름다움을, 신의 숨결을 경험하게 된다.
티벳어로 인간은 ‘걷는 사람’을 뜻한다. 인간은 그 어딘가를 향해 걷기 위한 존재이다. 그래서 인간을 ‘나그네’, ‘순례자’라고 부르는 것이 아닐까.
지금 당장 미친 듯이 달려가는 자동차 속에서 내려 푸른 숲길을 느릿느릿 걸어 보라. 자유가 무엇인지 행복이 무엇인지 금방 알게 될 것이다.
/수원등불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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