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호

고구려가 수나라와 당나라의 지방 정권이라는 중국의 주장은 고구려가 독자적으로 사용한 연호(年號)만 봐도 ‘역사 왜곡’이 드러난다. 연호는 군주 국가에서 어떤 왕의 통치시기를 나타내는 이름이다. 보통 왕이 즉위한 해를 원년이나 1년으로 하여 ‘○○ 몇 년’과 같은 방식으로 표현된다. 한 명의 왕이 하나의 연호를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때로는 연호를 바꾸거나 여러 개를 사용키도 했다.

광개토왕비에 따르면 고구려 19대 왕 광개토왕의 연호는 ‘영락(永樂)’이었다. ‘영원히 즐긴다’는 의미이므로 고구려가 영원히 번성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겼음을 짐작할 수 있다. 백제도 칠지도라는 칼에 새겨진 글을 보면 태화(泰和)라는 연호를 사용하였다. 이 또한 나라의 커다란 화평을 비는 마음에서 붙인 연호였을 것이다. 신라에서 연호를 사용하였음은 ‘삼국사기’ 등을 통해 확인된다. 6세기 전반 법흥왕 때 연호를 사용하기 시작하여 7세기 중반 진덕여왕 때까지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다.

연호는 반란을 일으키거나 새로운 나라를 세우려는 세력들도 자신의 주체성과 독자성을 강조하기 위해 내세우기도 했다. 신라왕의 자리에 오르기 위한 다툼에서 밀려난 다음 822년 반란을 일으킨 김헌창이 독자적인 나라이름과 함께 연호를 썼다. 후고구려를 세운 궁예는 2개의 연호를 썼으며 나라 이름을 태봉이라고 고친 다음에는 연호도 고쳐서 다시 2개를 사용하였다.

그런데 조선은 중국의 제후국임을 자처하면서 독자적인 연호를 쓰지 않았다. 수치스러운 역사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제국주의 열강에게 시달리던 고종은 ‘건양’이라는 연호를 일시적으로 사용하다가 1897년 나라 이름을 ‘대한제국’이라고 고치고 황제자리에 오르는 한편 ‘광무’라는 연호를 내세웠다. 대한제국이 중국과 대등한 황제국임을 나라 안팎에 선언한 것이었다. 비록 일본에 국권을 빼앗겼지만 고종은 나라를 지키려고 그야말로 사력을 다했다. 조정에 친일파만 적었어도 대한제국은 오늘까지 이어졌을 지 모른다.

/임병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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