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과거시험 최종 합격자는 대개 30명 안팎이었다. 그러나 과거는 합격자 발표로 끝난 게 아니었다. 탈락은 없었지만 ‘책문(策問)’이라는 마지막 관문이 있었다. 특히 최고 시험인 전시(殿試)는 왕이 직접 주관했다. 따라서 책문은 관리의 능력을 검증하는 시험이라기 보다 관리로 조정에 들어서는 패기만만한 젊은 선비(청년 지식인)들에게 임금이 국가문제, 정치현안 등을 묻는 자리였다. 예컨대 “그대가 왕이나 혹 재상이라면 이 난국을 어떻게 풀겠는가?”등 이었다. 질문내용은 정치 뿐 아니라 외교·군사·경제·사회·문화·교육·풍속 등 나라살림 전반이었다.
1611년(광해군 3년) 광해군이 물었다. “당장 시급하게 힘써야 할 것으로 무엇이 있겠는가?” 선비 임숙영은 왕의 생모인 공빈 김씨에게 왕후의 존호를 올리려는 이이첨을 고발하기로 작심하고 질문의 요지에서 벗어나 “척족의 횡포와 후궁의 아첨을 뿌리쳐야 한다”고 강조한 뒤 “임금의 잘못이 곧 국가의 병이라는 것을 대략 말씀드린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자기 수양에 깊이 뜻을 두시되, 자만을 심각하게 경계하십시오”라고 대답했다.
중종 2년 문과시험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잘 하는 정치는 무엇인가”라는 책문에 권벌은 “군주는… 마음이 싹트기 전에 간직하고 기르며, 싹텄을 때 반성하고 살펴, 사물과 몸에 예속되지 말아야 합니다. 쉬울 때 어려움을 생각하며 작은 일에서 시작해 큰 일을 이루어야 합니다. 시작할 때는 마칠 때를 생각하고 시작을 했으면 끝마무리도 잘해야 합니다”며 흐지부지한 개혁정치의 폐부를 찔렀다.
1447년 세종 29년 문과중시에는 후일 사육신이 된 성삼문, 반대로 수양대군의 왕위찬탈에 가담해 영의정까지 된 신숙주가 한자리에서 책문을 받았다. 법의 폐단을 고치는 방법을 묻자 성삼문은 “마음이 정치의 근본이고 법은 정치의 도구”라고 전제, “군주가 먼저 마음을 잡아야 한다”고 했고, 신숙주는 “적합한 인재를 얻어 쓰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답을 냈다. 조선시대의 국사와 시정에 대한 고민과 해결방법은 오늘날에도 여전한 과제다./임병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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