身 敎

조선시대의 ‘교수(敎授)’는 중등학교의 유생을 가르치는 교원과 전문지식을 가르치는 기술직 관리에게 붙여진 호칭이었다. 중등학교는 서울에 있던 사학(四學)과 지방의 향교를 가리키는데 사학의 교수는 성균관 관리가 겸하고 향교의 교수는 문과출신이나 생원 진사 중에 임명되는 것이 일반 관례였다. 기술직 교수에는 신학교수, 율학교수, 의학교수, 한학교수 등이 있었는데 해당분야의 관청에 근무하면서 후배를 가르치는 임무도 병행했다.

조선시대의 교수의 직급은 종6품으로 중급관리 중에서 제일 낮은 등급이었다. 기술직 교수는 전문분야를 가르친다는 점에서 오늘날의 교수와 공통점이 많지만 고급관리로 진출할 수 없는 중인출신이라는 한계가 있었다. ‘박사(博士)’라는 관리도 있었다. 국왕 자문기관인 홍문관이나 국가문서를 작성하는 숭문원, 고등교육을 담당하는 성균관에 소속된 실무관리였다. 이들은 정7품의 하급관리였지만 학문을 응용하는 기관에 소속돼 고급관리로 승진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교수와 구별됐다.

대학이 지도자 양성을 목적으로 한다고 볼 때 이에 해당하는 기관으로는 시강원과 강서원, 성균관이 있었다. 이 세 기관은 왕세자, 왕세손, 문과에 응시할 유생의 교육을 담당했으므로 이들 기관의 관리가 오늘날의 대학교수에 해당한다. 그런데 세 기관의 책임자는 고급관리가 겸임했다. 시강원과 강서원의 책임자는 스승을 의미하는 사(師)와 박(博)였는데 이는 최고 지도자의 교육을 책임지는 막중한 자리였으므로 최고위 관리인 의정부 정승이 담당했다. 이에 비해 성균관의 책임자는 그보다 직급이 낮은 홍문관 대제학이 겸임했다. 이 세 기관의 관리는 지도자의 양성을 담당한 이상 ‘학식과 행실에 대한 평판이 사림(士林)들 사이에 뛰어난 사람’이어야 했다. 높은 학식과 모범적 품행이 요구된다는 점에서 오늘날 대학교수에게 요청되는 자격과 다를 바 없다. 전통시대의 교육에서는 말로 하는 ‘언교(言敎)’보다 몸으로 보여주는 ‘신교(身敎)’가 중시됐다. 스승의 일상적 말과 행동을 통해 학생에게 긍정적 영향을 미침으로써 수행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오늘날 교수들이 필히 생활화해야 할 덕목이다./임병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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