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희궁

사적 271호인 ‘경희궁’은 일제의 조선궁궐 훼손 정책으로 인해 가장 큰 피해를 본 ‘비운의 궁궐’이다. 원래 조선 인조의 생부인 원종의 사저가 있던 곳이다. 1616년(광해군 8년)건립 당시에는 ‘경덕궁’이라고 불렀으나 1760년(영조 36년)에 경희궁으로 고쳤다. 경희궁에 임금이 거처하기 시작한 것은 인조 때다. 이괄의 난으로 거처하던 창경궁이 불 타자 1624년 2월부터 경희궁에 거처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경희궁(서궐)은 280여년 동안 창덕궁(동궐)과 함께 여러 왕들의 거처로 사실상 정궁으로 사용됐다.

경희궁은 경사진 야산 지형과 조화를 이룬 구조로 건축적·예술적으로도 뛰어났다. 숙종 때 편찬한 ‘궁궐지’를 보면 전각과 문루가 99동에 이를 정도로 대규모였다. 그러나 경희궁은 일제의 침략 뒤 경성중학교로 바뀌면서 완전히 해체됐다. 이는 경복궁을 조선총독부로, 창경궁을 동물원으로, 창덕궁을 비원으로 격하했던 일제의 조선말살정책의 하나였다.

정전인 숭정전은 1908년 경성중학교의 교실로 이용되다가 일본절 ‘조계사’로 팔렸고, 현재는 동국대의 ‘정각원’이라는 불당으로 남아 있다. 정문인 홍화문은 1932년 이토 히로부미 사당인 ‘박문사’의 북문으로 쓰였으며 2002년 경희궁터로 옮겨졌다. 해방 뒤에는 서울고등학교가 들어서 있다가 현대건설이 터를 사들였고 이를 다시 서울특별시가 인수해 1988년 경희궁터를 1차 복원했으며, 2002년에는 숭정전, 임금이 공무를 보던 자정전, 영조의 초상화를 모셨던 태령전 등을 복원해 시민들에게 공개했다.

당초 서울시는 2007년까지 164억원을 들여 왕의 침전인 회상전, 임금이 다니던 어도 등을 복원할 계획이었으나 문화재청과 서울시가 서로 비용을 부담하지 않으려는 바람에 복원공사가 중단됐다. 복원 범위는 커녕 일제가 군사적 목적으로 경희궁에 설치한 대형 방공호도 아직 철거하지 못한 상태다. 서울시는 과거 경기도와 수원시가 화성을 복원하는 데 적극적으로 나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인정받았듯이 서울경희궁 복원에 능동적으로 대처해야 한다. 경희궁을 계속 ‘비운의 궁’으로 방치해서는 안 된다./임병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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