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4년 집권한 흥선 대원군은 왕권을 강화하고자 경복궁 중건과 군비확충을 꾀했다. 그러나 국고가 텅 비어 있었다. 이에 우의정 김병학의 제안으로 1866년 11월6일 ‘당백전(當百錢)’을 발행했다. 돈을 찍어 재정을 확보하는 원시적인 정책이었다.
5개월여 동안 찍어낸 당백전은 1천600만냥에 달했다. 당시 쌀 한 섬이 7냥 정도였으니 지금 시세로 1천억원을 넘는 금액이 시장에 풀린 셈이다. 1천100여년동안 속리산 법주사를 지키던 ‘금동미륵대불’도 당백전 재료로 쓰기 위해 녹여 없앴다.
상평통보(常平通寶) 한 푼의 100배 가치를 지녔다는 당백전이지만 그것은 명칭과 정반대로 ‘시장의 천덕꾸러기’였고 휘청거리던 조선 말 경제에 치명타를 날린 주범이었다. 대원군은 관청에서 지출하는 돈은 당백전을 쓰도록 강제했다. 그러나 서민들은 당백전을 믿지 못했다.
우선 동전의 실질가치에 비해 액면가가 턱없이 높았다. 가짜를 만들어 많은 이득을 남기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정부에 대한 신뢰가 떨어진 상황에서 고액 화폐는 소장할 가치가 없었다.
‘악화(惡貨)가 양화(良貨)를 구축한다’는 그레셤의 법칙에 따라 서민들은 상평통보를 숨기고 당백전만 써댔다. 결국 당백전은 엽전의 100배가 아닌 5~6배의 구매력밖에 갖지 못했다.
통화량의 급격한 증가는 인플레를 불렀다. 당백전 발행 1년 만에 쌀값은 6배로 치솟았고 그 쌀값을 대기 위해 가짜 당백전이 또 만들어졌다. 정부는 화폐 위조범을 사형에 처한다고 했지만 소용없었다. 화폐 질서는 순식간에 무너졌다. 최익현의 상소 등의 영향으로 당백전은 1868년 5월 사용이 중지됐다. 그러나 조선의 화폐는 권위를 회복하지 못했고 청나라 동전 사용이 합법화되기에 이르렀다.
현시대는 통화량이 일정 기준 이상 늘어나지 않도록 한국은행이 통제하고 있어 현대판 ‘당백전 파동’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일이다. 그러나 정부가 올해 외환시장 안정용 국고채 발행한도 18조원이 거의 소진돼 시장 개입 여력이 바닥나자 한국은행에 발권력 동원을 요청한 것은 석연치 않다. 한국은행이 찍어 내는 돈이 만에 하나라도 당백전 같은 부작용을 초래한다면 큰일이다.
/임병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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