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슴’의 시인으로 널리 알려진 노천명은 해방되기 직전인 1945년 2월25일 시집 ‘창변’을 출판하고 성대한 출판기념회를 열었다.
이 시집 말미에는 4편의 친일 시가 실려 있던 것으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출판한 지 얼마 안돼 해방이 되자 노천명은 이 시집에서 친일 시 부분을 뜯어내고 그대로 시판하였다.
전쟁 말기의 상황에서 미처 배포하지 못하고 쌓아놓고 있던 시집을 땅 속에 묻거나 태워버릴 수도 있었을텐데 그러기는 아까웠던 모양이다. 특히 친일 시들은 시집의 마지막 부분에 실려 있어 그러한 유혹이 더욱 컸을 것이다.
그러나 본문의 친일 시 부분을 뜯어내고 흔적을 지웠지만 목차 부분에는 그 흔적이 일부 남아 있었다. 목차 중 친일 시 제목만 나열돼 있는 마지막 쪽은 뜯어내고 다른 시와 친일 시 제목이 함께 인쇄된 쪽에는 친일 시의 제목 부분만 창호지로 붙여 보이지 않게 한 ‘재단장판’이 주로 유통됐기 때문에 지금까지 노천명의 친일 시는 제목만 확인할 수 있었던 ‘흰비둘기를 날려라’ ‘진혼가’ ‘출정하는 동생에게’ ‘승전의 날’ 정도였다.
그런데 최근 발견된 원본 ‘창변’에는 목차의 마지막 쪽이 뜯겨 나가 제목조차 확인할 수 없었던 친일 시 ‘병정’ ‘창공에 빛나는’ ‘학병’ ‘천인침’ ‘아들의 편지’가 추가로 실렸다.
‘창변’은 1944년 10월 이전에 발표된 시들을 모았기에 그 이후 발표된 친일 시들은 물론 이 시집에 없는데 ‘군신송’ ‘신익’ 은 ‘창변’ 이후에 ‘매일신보’에 발표한 시들이다.
일본의 가미카제 특공대는 1944년 10월 이후부터 시작되었고 조선의 일부 시인들도 이 시기에 조선인 출신 특공대를 기리면서 전쟁을 독려하는 시를 발표했다. 노천명의 ‘신익’은 서정주 보다도 앞서 조선인 출신으로 특공대에 나가 최초로 죽은 마쓰이 오장을 노래한 것이다.
그동안 친일 문학이 제대로 규명되지 않았던 것은 시간이 너무 지났기 때문이 아니다. 관심이 부족했던 까닭이다. 친일 진상 규명 여부는 시간이 아니라 역사 인식의 문제이다. 친일시 부분을 뜯어내고 ‘창변’을 시판한 노천명을 생각하면 서글프다.
/임병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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