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서구철학의 최고봉으로 추앙받는 철학자 이마누엘 칸트(1724~1804)는 1804년 2월12일 밤 임종의 침상에서 목이 마르다고 했다. 옆에 서 있던 이가 포도주와 물을 섞어 기력이 완전히 쇠잔한 그의 목을 축여 주었다. 기운이 조금 돌았던 걸까. 그는 나직한 목소리로 ‘그것으로 좋다’(Es istgut)고 속삭였다. 그리고 그대로 여든살의 칸트는 영면했다.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을 두고 남겨진 사람들의 해석이 분분했다. 단 음료수 맛이 좋다는 뜻이었을까. 아니면 자신이 살아온 삶이 만족스러웠다는 뜻 이었을까. 그를 따르는 사람들은 후자의 뜻으로 해석하고 싶어했다.
칸트는 오늘날 철학에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한번은 대결해야 할 인물이다.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판단력비판’을 비롯한 그의 철학적 저작은 후대에 끼친 영향이 실로 커서 거의 모든 철학적 저작이 이 3대 비판서를 포함한 칸트 철학을 회피해가지 못한다.
생활인으로서 칸트에게는 사건이라 할 만한 것이 거의 없었다. 평생 고향 괴니히스베르크대학 교수가 돼 줄곧 공부만 하며 살았다. 규칙적인 자기반복적 생활은 칸트 철학을 모르는 사람도 다 알 정도로 유명하다. 그는 결혼도 하지 않았고 자식도 없었다. 철학이 그의 애인이었다.
칸트에게 ‘아이의 첫 울음소리’는 ‘인간의 고뇌에 찬 자유의 충동’이었다. 그의 철학적 주제는 처음부터 ‘자유’였다. 그에게 진정한 사건이 있었다면 근대 물리학의 아버지 아이작 뉴턴의 저작을 읽었을 때, 그리고 형이상학을 공격하는 회의주의자 데이비드 흠의 저작을 읽었을 때 받은 지적 충격이었다.
이 두 사건은 그를 공허하고 독단적인 형이상학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게 해주었다. 그러나 그는 자연세계의 객관적 질서를 뛰어 넘는 초월적인 숭고의 세계, 이성의 정언명령에 따른 도덕률의 세계를 끝까지 간직했다. 이를테면 그가 마지막에 썼던 경구 ‘내 머리 위에 별이 총총히 빛나는 하늘과 내 마음속의 도덕법칙’은 그가 평생 간직했던 ‘형이상학적세계’였다. 생활은 단조로웠으나 철학엔 혁명을 몰고 온 ‘자유사상가’의 삶이 요즈음 자꾸만 생각난다./임병호 논설위원
로그인 후 이용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