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부정

입신양명의 출세길이었던 조선시대 과거시험에서도 부정이 많았다. 대표적인 부정 방법은 ‘차술차작(借述借作·대리시험)’, ‘수종협책(隨從挾冊·시험장에 책 반입)’, ‘입문유린(入門蹂躪·시험장에 드나들기)’, ‘정권분답(呈券分遝·답안지 바꿔치기)’, ‘외장서입(外場書入·시험장 밖에서 답안작성)’ 등이다. 시대만 달랐지 최근 대입수능부정과 방법이 흡사하다.

숙종 때는 조선시대 과거시험 부정의 ‘전성기’였다. 숙종시대에는 시험부정사건인 ‘과옥(科獄)’이 세 차례나 일어났다. 기묘·임오·임진과옥이 그것이다.

기묘과옥은 5년 간의 조사기간을 거쳐 50명의 수험생들이 처벌받고 문과시험은 시험자체가 무효화된 대형사건이었다. 임오과옥은 9명의 합격자 가운데 채점자와 사촌 이내 친인척 관계에 있었던 사람이 8명에 이르렀다는 사실때문에 각종 의혹이 제기됐었다. 임진과옥 역시 채점자가 알아볼 수 있는 암표가 쓰였다는 의혹이 제기되면서 크게 문제가 됐다.

과옥은 단순한 시험부정 사건이 아니었다. 때로는 정치적 사건으로 비화되기도 했는데 이는 당시 노론·소론간 다툼에 원인이 있었다. 임진과옥의 경우 문제가 된 채점자가 소론측 인물이었기 때문에 노론의 집권 때는 합격이 전부 취소됐다가 소론 집권 때는 다시 원상복귀되는 등 정치적 부침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부정부패로 인해 숙종 때에 지속적인 제도개선이 이뤄졌다. 여기에는 노론·소론간 다툼이 긍정적인 역할을 했다. 다툼이 치열해질수록 처벌은 엄정해지고 규율이 강화됐기 때문이다.

과거제 관련 지침의 80%가 이때 새로 만들어지고 정비됐다. 이런 숙종 때의 노력이 영조·정조대의 법전 편찬과 정비에 큰 영향을 끼쳤고 그 토대 아래 영·정조대 안정과 번영이 가능했다.

부정을 덮어둔 게 아니라 밝혀내 처벌함으로써 제도개선·개혁이 가능했다는 사실(史實)이다. 오늘날 대학입학수능시험 부정 사건이나 각종 국가시험제도의 부작용이 흐지부지 처리돼서는 안되는 뜻이 여기에 있다.

/임병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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