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인(杏仁)

중국 한나라 때 동봉이라는 의사가 있었다. 그는 독약을 먹고 죽은 지 사흘이나 되는 시체까지 살린 의사로 소문 났지만 환자를 치료하고도 치료비를 요구하지 않았다. 주면 받고 줄 형편이 못 되면 괜찮다고 위로하는 기인이었다. 다만 중환자에게는 살구나무 5그루를, 좀 약한 환자에게는 살구나무 1그루를 심으라고 권해는데 그렇게 하기를 수십년이 되자 어느덧 동네는 수십만 그루의 살구나무로 숲을 이루게 됐다. 엄청난 양의 살구가 열리자 그는 동네 사람들에게 곡식을 가져와 그 값어치만큼 살구를 따먹으라고 했는데 이렇게 모아진 곡식으로 다시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 주었다. 그래서 인술을 베푸는 의사를 살구나무 행(杏)자를 써서 ‘행림(杏林)’이라고 부르게 됐다.

살구는 사과·배·복숭아만큼 친숙한 과일은 아니다. 예전에는 흔했지만 요즘은 1년에 한번 먹을까 말까 할 정도이다. 하지만 살구씨는 좀 다르다. 씨앗들 중 약재로 중요한 역할을 한다.

‘동의보감’에도 “살구씨는 기침이 북받쳐서 호흡곤란을 일으킬 때, 숨이 가쁘고 가래가 끓을 때 사용한다. 그리고 진해거담제 역할을 한다”고 기록돼 있다. 행인(杏仁·살구)은 기침·인후통·편도선염에도 좋다. 살구씨에는 지방성분이 많이 함유돼 위를 편안하게 하며 대장운동을 촉진, 변비개선에도 효과적이다. 특히 진액이 말라 오는 노인성 변비와 산후 변비에 좋다고 한다.

서양에서도 훌륭한 식품으로 정평이 나 있다. 서양동화에 자주 등장하는 요정의 주식이 살구였으며, 아폴로 13호에 싣고 가 우주탐사대의 건강식으로 사용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비타민A와 C가 많고 무기물인 칼륨을 다량 함유하고 있어 무중력 상태에서 우주 비행사들의 심장을 건강한 상태로 유지하는 데 도움을 준다. 최근에는 살구씨 가루나 기름을 이용한 피부 미용법이 인기를 끌고 생리통 생리불순 치료에도 쓰인다.

그렇다고 행인이 만병통치약은 아니다. 약간의 독성이 있어 성인은 한 번에 10알 이상 먹지 말고, 어린이는 3알 이상은 먹지 않는 게 좋다. 그러나 행인에 중독됐을 때 살구나무 껍질이나 뿌리를 달여 마시면 해독이 된다니 신묘하다.

/임병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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