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사성어 정치

아무래도 고사성어(故事成語) 정치의 달인은 JP(김종필)가 아닌가 싶다. 정계에서 은퇴했지만 영원한 2인자로 고빗길마다 변화무쌍한 고사성어로 심경과 정치를 전했다. 예컨대 김영삼(YS) 대통령 밑에서 불안한 2인자로 있던 1994년 JP는 ‘상선여수(上善如水)’를 신년휘호로 썼다. 퇴진의 벼랑에 처한 이듬해 내놓은 것은 ‘종용유상(從容有常·무슨 일이 있어도 어긋나지 않게 살다)’이다. 기사회생하여 1997년 대선을 앞두고 마지막 승부를 벼를 때는 ‘줄탁동기(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를 내놨다. JP의 고사성어 정치는 운치와 여백이 있어 인기가 많았다. 5·16 이후 외유를 떠나며 ‘자의반타의반’, ‘서울의 봄’을 비유한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등은 유명하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자조정신’, 김영삼 전 대통령의 ‘대도무문’, 김대중 전 대통령의 ‘실사구시’ 등은 선명해 힘이 있었지만 JP의 고사성어 구사는 멋이 실렸다. 그러나 올해는 침묵을 지켰다.

노무현 대통령은 올해 ‘선진한국’을 강조했고 청와대는 “올해의 키워드는 ‘위대한 한국(great korea)’이 될 것”이라고 부연설명했다. 이해찬 국무총리는 ‘화이부동(和而不同)’을, 이헌재 부총리겸 경제부총리는 ‘여시구진(與時俱進)’을 걸었다. ‘여시구진’은 2002년 당시 중국의 장쩌민 국가 주석이 ‘공산주의 사상과 제도를 시대에 맞게 고쳐야 한다’는 뜻으로 처음 사용한 뒤 중국에서 급속히 유행한 말이다.

당내 보수세력 등의 사퇴압력을 받았던 한나라당 김덕룡 원내 대표는 ‘해현경장(解弦更張·거문고 줄을 풀어 팽팽하게 다시 맨다)’을 신년 화두로 던졌다. “새로운 줄이 필요하니 자신은 사퇴하겠다는 뜻”, “새롭게 시작할 테니 다시 밀어달라는 뜻”이라는 상반된 해석이 엇갈리고 있으나 요즘 한나라당의 기류가 이상하여 의미가 심장하다.

간결하면서도 깊은 여운, 짧은 네 마디로 마음과 다짐을 전하고 싶은 것은 특히 말로 먹고 사는 정치인들의 욕망이겠지만 대가인 척, 억지로 멋스러움을 내는 것 같은 때도 없지 않다. 고사성어 정치에 식상했는가. 노무현 대통령의 고사성어식 화두는 왜 안나오는 지 궁금하다./임병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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