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화의 虛構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1556~1618)은 조선 선조·광해군 무렵의 명재상이다. 임진왜란 때는 다섯번이나 병조판서에 임명돼 난국을 해결한 공신으로 유명하지만 백사의 이름이 더욱 알려진 것은 그의 공적때문만이 아니다. 해학과 기지가 넘치는 어린 시절 일화 때문이다. 절친한 친구인 한음(漢陰)과 얽힌 이야기들은 잘 알려졌다.

백사는 문장을 잘해서 입신양명한 문인이었다. 시를 잘 지으면 벼슬길에 올랐던 시절이긴 하지만 백사는 허균(許筠)의 시집에 서문을 쓰고 수십 편의 묘지명과 시집을 남겼다. 백사가 쓴 시는 다른 시인과 달리 재치와 기지가 넘친다. 자신의 아들 생일에 이런 시를 쓰기도 했다.

“부잣집은 딸을 낳아 온갖 시름 모여들지만 가난뱅이는 아들 낳아 만사가 넉넉하네 / 날마다 천 전(錢)을 들여 사위 대접 하기 고생이지만 책 한 권 아들에게 읽히면 그만이지 / 나는 지금 아들 뿐 딸이 없는데 큰애는 글을 알고 작은애는 인사할 줄을 아네 / 뉘 집에서 딸 길러 효부(孝婦)를 만들어 놓을는지? 내 아들 보내서 천 년 손님 만들어야지 / 집 지키고 취한 몸 부축할 일 걱정없으니 장가를 보내고 늘그막에 낙이나 누리련다”

장난 삼아 지은 희작이므로 그의 진심이 담긴 시로 읽을 필요는 없다. 그러나 아들을 부잣집 딸에 장가보내 덕을 보겠다니 익살이 지나치다. 백사는 또 ‘무제(無題)’란 제목으로 남녀 간의 사랑을 읊은 시를 적잖이 썼다고 한다. 호방하고 익살스러운 성정대로 거침없이 쓴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백사의 문집에는 이런 작품이 많지 않다. 백사가 타계한 뒤 그의 문하생들과 자제들이 문집을 엮을 때 백사의 위엄을 손상시킬 우려가 있는 시문은 모두 빼서 싣지 않았다는 야사가 있다. 백사가 지닌 인간미나 활달한 문인의 모습은 현재 전하는 문집에서 찾기가 어렵게 만들어 버렸다.

그렇다면 백사 이항복에 대한 일화들이 의심이 간다. 사실 백사는 한음과 23세 때 비로소 교제를 했기 때문에 어린 시절의 일화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일화를 재미로 생각해야지 모두 사실(史實)로 여기는 것은 곤란하다. 역사의 허실(虛實)은 도처에 있다./ 임병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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