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설

‘수호전(水滸傳)’에 이런 장면이 전개된다. 80만 금군(禁軍)의 교두(敎頭)였던 표자두(豹子頭) 임충(林沖)이 날조된 죄를 뒤집어쓰고 억울하게 창주(?州)로 유배되어 폭설 속에서 고생하는 이야기다. 임충을 죽이기 위해 고태위가 밀파한 네명의 자객이 그를 초료장(草料場) 관리인으로 삼고 그가 잠든 사이에 초료장을 불태울 계획을 짠다. 때는 엄동설한이어서 폭설이 내려 추위에 떨던 임충이 술을 사기 위해 먼 주막까지 길을 나선다. 날은 춥고 어두운데 임충은 폭설이 퍼붓는 길을 술병을 매단 긴 창을 어깨에 멘 채 걸어간다.

술을 사 가지고 돌아오니 거대한 초료장은 눈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무너져 내렸다. 임충이 잠시 다른 곳에 피신한 사이 자객들은 임충이 안에 있는 줄 알고 초료장을 불태운다. 목초를 쟁여둔 창고가 불길에 휩싸이고 분노한 임충이 자객 넷을 죽이는 사건이 뒤를 잇는데 그 사이에 눈은 갈수록 세게 퍼부어 대지를 하얗게 덮는다. 폭설 속에서 음모와 분노, 살인과 복수가 벌어지지만 눈은 그러한 인간들의 추태를 아랑 곳 하지 않고 뒤덮어 버린다. 임충이 긴 창 끝에 술병을 매달고 폭설을 헤치며 가는 장면은 상상할수록 비장미가 넘친다. 폭설 속에서 불타는 초료장의 거대한 불길도 눈에 선한 ‘수호지’의 이 장면은 불운에 좌절하지 않는 임충의 강렬한 분노와 의지를 보여준다.

우리나라 순조 연간의 시인 이양연(李亮淵)의 작품에 ‘야설(野雪)’이란 시가 있다. “눈발을 뚫고 들판 길을 걸어가노니(穿雪野中去) / 어지럽게 함부로 걷지 말자(不須胡亂行) / 오늘 내가 밟고 간 이 발자국이(今朝我行跡) / 뒷사람이 밟고 갈 길이 될테니(遂作後人程)”

백범 선생이 애송했다는 이 시를 읽으면 갈등의 세상을 헤쳐가는 묵직한 인생행보가 보인다.

내가 처음 걸어간 족적을 따라 올 뒷 사람의 행보를 위해 신중하게 걸어가는 것은 도인의 길이다. 겨울 가뭄을 해소하고 초목의 뿌리를 적셔주는 백설이 함박으로 내려 이 세상 추한 것을 잠시라도 덮어 주었으면 좋겠다.

/임병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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