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심태(趙心泰·1740~1799)는 조선조 22대 정조대왕이 수원에 ‘화성(華城)’을 축성할 때 수원부 유수로 큰 업적을 남긴 무인이다. 1768년(영조 44) 무과에 급제하여 여러 무관직을 두루 거친 다음, 1785년(정조 9) 충청도병마절도사가 됐다. 같은해 3도수군통제사로 승진한 뒤, 좌포도대장· 총융사에 이어 1789년 수원부사(水原府使)에 임명됐다.
이 무렵 수원이 매우 중시돼 정조대왕의 생부 사도세자 묘소(후일 현륭원, 융릉)를 양주 배봉산에서 수원 화산으로 천장하는 일, 수원 읍치를 팔달산 아래로 옮기는 일 등 어려운 임무가 많았으나 모두 차질없이 완수하고 1791년 훈련대장으로 직을 옮겼다.
그뒤 총융사· 금위대장·어영대장 등을 역임하였고, 1794년 승격된 수원부 유수로 다시 등용돼 화성 축성, 화성봉수대 설치 등의 방어시설은 물론 호수를 중심으로 송림을 보호하는 문제에 이르기까지 지대한 공헌을 남겼다. 두 차례에 걸쳐 전후 5년 간을 수원지방관이 된 그는 정조대왕으로부터 업적을 인정 받아 우의정 채제공(蔡濟恭)과 함께 가장 뚜렷한 공신으로 평가돼 1797년 이후 한성판윤·형조판서·대호군·장용대장(壯勇大將)을 지냈다. 무관으로서는 보기 드문 명필이었으며 특히 대자(大字)에 뛰어났다.
수원 신읍치 조성, 화성 축성시 정조대왕에게 올린 장계·소계·계상 등은 유명하며 특히 어명을 받들어 정조 18년(1794년) 1월부터 정조 20년(1796년) 8월까지 근 3년동안 화성 성곽 축조의 시말과 제도·의식 등을 자세히 기록한 책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 편찬에 착수한 일은 유명하다. 즉 세계문화유산적인 ‘화성성역의궤’는 성역을 끝낸 지 약 한달 후인 1796년 9월 10일 정조대왕이 조심태에게 하명한 데서 비롯됐고 그후 약 두달 후인 11월 이루어졌다. 불과 200여년 전 일이다. 조심태 수원부유수의 후손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 지 문득 궁금해진다.
/임병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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