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문학교과서 ‘춘향전’에 나온 “여봐라! 서울서 동부승지 교지(校旨)가 내려왔다” 중 ‘교지’의 한자는 ‘敎旨’인데 잘못 표기됐다. 조지훈의 ‘지조론’ 중 “적빈(赤貧)이 여세(如洗)라”는 말은 ‘몹시 가난하여 마치 물로 씻은 듯이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음’이 맞는 풀이다. 그런데 교과서에는 ‘손씻은 물로 국을 끓여 먹을 정도로 가난함’을 비유한 말이라고 썼다. 이런 오류가 무려 100군데가 넘는다.
최근 고등학교 국어와 문학교과서의 한자 표기와 번역 등이 엉터리라는 지적이 나온 직후, 교육인적자원부 관계자와, 교과서 검정위원이 한 말이 몹시 거슬린다. “인력과 기간이 부족한 교과서 검정시스템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평소 절실히 느꼈습니다.”(교육인적자원부 관계자). “과목별로 타 영역 전문가와 협의하지 않는 현재의 검정시스템에선 교과서의 오류는 너무 당연한 것입니다.”(교과서 검정위원). 정말 어처구니가 없다. 문제점이 있는 사실을 알면서도 시정하지 않았다니 얼마나 무책임한 얘기인가.
교육부가 한국교육과정평가원에 위탁해 진행하는 교과서 검정작업은 투입 인력, 기간이 과목마다 다르지만 보통 3~4개월 이내로 10여 명이 수행한다. 교과서 심의가 2~3차 걸쳐 이뤄지지만, 한 번 심사하는 기간이 보통 보름 이내이기 때문에 수십 종의 책을 정밀하게 심사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교과서 집필자의 양식을 믿는 수준에서 심사가 이뤄지는 게 현실이다. 검정작업을 호텔, 콘도 등에서 비밀리에 수행하는 것도 문제점이다. 검정위원들이 원전(原典) 등 충분한 자료를 참고하지 못하고 기억력에 의존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부실’은 보나마다이다. 특히 각 과목의 검정위원에 관련 영역의 전문가들이 참여하지 않는 것은 더욱 큰 문제점이다. 출판사들이 집필단계에서 비용을 줄이려고 타 영역 전문가들을 배제하는데 교육 당국의 검정시스템도 마찬가지다. 국어나 문학교과서 집필, 검정 과정에 한문전공 교사를 참여시키지 않는 것이다.
“교과서의 오류를 확인해달라는 어느 학생과 교사의 요청에 따라 작업을 했습니다.” 이번에 한자 오류를 지적해낸 장호성 교수의 말이다. 집필위원이나 검정위원보다 부실을 먼저 발견한 학생과 교사들이 있는 게 천만다행이다./임병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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