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의 누
조선시대판 살인의 추억 ‘혈(血)의 누(淚)’는 피눈물이다.
피눈물이 난다는 것은 한이 사무친다는 의미.
말할 수 없이 억울할 때, 그 억울함으로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벌어졌을 때 피눈물이 난다.
조선 후기 한 외딴섬. 종이를 만드는 제지소의 운영으로 번창해가는 이 섬에 연쇄살인 사건이 발생한다. 그것도 대단히 참혹한 방식이다. 또 그에 앞서 원인 모를 화재로 조공용 종이가 가득 실린 배가 불타버린다.
한양에서 수사관이 파견된다. ‘과학수사’를 내세우는 냉철한 원규(차승원 분)는 섬을 지배하고 있는 이상한 기운을 감지하고 그 실체 파악에 나선다.
그 핵심에는 마을 사람들의 묵인하에 억울하게 참형을 당한 한 가족의 사연이 놓여있다. 사극의 특성상 조금이라도 허점이 보이면 영화가 대단히 허술해보이기 마련. 캐스팅, 의상, 대사, 로케이션, 미술 등 곳곳에 지뢰가 놓여있다.
그런 면에서 ‘혈의 누’는 합격점을 무난히 넘어선다. ‘스캔들’처럼 미(美)를 탐하지는 않았으나 영화는 나름의 치밀한 고급스러움으로 관객을 정성껏 맞이한다.
여기에 사극과 스릴러의 결합이 별다른 누수 없이 잘 어울렸다. 조선 후기라는 시대적 배경을 온몸으로 껴안은 영화는 자칫 스릴러에 함몰되기 쉬운 유혹을 떨치고 무게중심을 잘 잡았다.
서서히 균열이 생기는 반상의 질서와 그 사이를 비집고 꿈틀대는 자본주의 사상, 그리고 당시의 ‘마녀사냥’ 구실이 됐던 천주교도 등의 설정이 맞물려 돌아가는 속에 안경, 종이, 도르래 등의 장치가 시대를 흥미롭게 대변한다.
또한 영화는 고전적 액션의 신기원을 열었다. 제지소 내에서 벌어지는 액션은 CG에 기대지 않고 오직 제지소 내 각종 도구와 장치를 이용해 전개된다. 할리우드 영화로 익숙한 부비 트랩의 묘미가 조선 시대 제지소에서 펼쳐지는데 그 재미가 상당하다.
이러한 ‘기본’을 바탕으로 영화는 원규 캐릭터의 변화를 심도있게 포착했다. 김대승 감독은 원규의 공명심과 자부심이 수사가 진행됨에 따라 점차 수치심과 배신감으로 변하는 과정을 세밀화를 그리듯 표현했다.
이 과정에서 차승원은 기존의 코믹한 이미지에서 나오는 선입견을 보란 듯 깨버린다. 그는 시종 묵직한 톤으로 원규 캐릭터를 끌어나갔고 성공적으로 정극에 안착했다. 차승원의 이러한 변화는 영화를 보는 대단히 중요한 재미다. 자신을 정상으로 이끈 이미지를 정면으로 배반하기란 스타로서는 결코 쉽지 않은 선택. 웬만큼해도 본전을 하기 힘들기 때문인데 그런 점에서 그를 원규 역에 캐스팅한 좋은영화사의 안목과 용기도 높이 평가된다.
5월 4일 개봉, 18세이상관람가.
■밀리언즈
돈벼락 맞으면 뭐할거니?
하늘에서 돈벼락이 떨어진다. 그런데 이 돈을 쓸 수 있는 기간은 열흘 뿐이다. 그렇다면 뭘 해야할까. 현대인들에게 이보다 더 즐거운 고민은 없을 것이다.
‘밀리언즈’는 유로화 통합에 관한 가장 깜찍하고 예쁜 이야기다. 돈다발이라는 지극히 세속적인 소재에 천진무구한 동심을 버무리고, 양념으로 엄마 잃은 아이의 보편적인 슬픔을 가미한 영화는 귀여운 동화로 탄생했다. 할리우드식 동화의 스테레오 타입에서 벗어나 기발한 상상력을 발휘한 것도 눈여겨볼만 하다.
영국의 한 소도시. 기찻길 옆에 빈 박스를 쌓아놓고 그 안에서 노는 것을 좋아하는 7살 꼬마 데미안의 머리 위로 검정색 가방이 뚝 떨어진다. 누군가가 기차에서 집어 던진 가방 안에는 파운드화가 가득 들어있다.
9살 형 안소니는 “절대 아빠한테도 말하지 말고 신고도 하지마. 세금이 40%란 말이야”라며 둘이서 이 돈을 쓸 궁리를 한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파운드화가 열흘 후면 유로화로 통합되는 것. 은행에서 환전을 하지 않는 한 열흘 후면 이 돈을 쓸 수 없는데, 꼬마들이 무슨 수로 은행에서 환전을 한단 말인가. 그렇다면 신나게 쓰는 수밖에. 물론 이는 가상의 설정. 영국은 아직도 꿋꿋하게 파운드화를 쓰고 있기 때문에 주인공 꼬마들처럼 ‘미래를 고려하지 않는’ 신나는 씀씀이는 현실에서 경험하기 힘들다.
‘28일후’ ‘트레인스포팅’ ‘비치’ 등에서 독특한 감각을 뽐낸 대니 보일 다운 설정이다. 감독은 돈다발 이전에 형제의 엄마를 하늘로 보냈다. 어린 데미안에게 사람들은 “엄마는 착한 일을 많이 해서 하늘나라로 갔다”고 말했을 것이고, 이 때문에 데미안은 유독 죽은 성자와 성녀의 이야기에 집착한다. 대니 보일의 괴짜 기질은 이 부분에서 도드라진다. 데미안의 상상을 통해 “하늘에서는 뭐든 자유롭게 할 수 있어”라며 담배를 피우는 성녀, 참수형 자국이 목에 그대로 남아있는 성자, 데미안 대신 학교 연극에서 목소리 연기를 해주는 성자 등을 등장시키는 것. 데미안은 이들을 만날 때마다 “하늘에서 우리 엄마 봤어요?”라고 천진난만하게 묻는다.두 형제의 180도 다른 돈 씀씀이도 흥미롭다. 어른처럼 세금과 부동산을 운운하는 안소니는 아이들에게 돈을 뿌리며 사람 부리는 재미에 빠진다. 반면 데미안은 만나는 사람들마다 “가난하세요(Are you poor)?”라고 물으며 그들을 돕기에 분주하다. 감독은 어른의 축소판인 이들을 대비시키며 돈에 대한 인간사 백태를 살짝 풍자했다. 청빈함을 내세운 몰몬교도들이 데미안이 몰래 기부한 돈으로 어마어마한 금액의 가전제품을 사들인 것이 그중 압권. 대니 보일은 지금까지와 달리 동화 속 예쁜 집 한채를 짓는 느낌으로 화면을 밝고 따뜻한 파스텔톤으로 유지했다. 돈이 아무리 많아도 죽은 엄마를 되돌릴 수 없다는 뻔한 메시지를 나름의 감각으로 포장한 솜씨도 괜찮다. 그러나 아쉽다. 좀더 발칙하고 좀더 깜찍하기를 기대했다. 모두가 같은 길을 갈 필요는 없지 않은가.5월 5일 개봉, 전체관람가.
■킹덤 오브 헤븐
‘서민적 영웅’ 모험담
땅을 둘러싼 국가간의, 그것도 두 문화권이 충돌하는 곳에서의 분쟁은 복잡하게 얽혀있는 실 뭉치처럼 풀어헤치기가 쉽지 않다. 화약고 중동 지역이 대표적이다.
이슬람 문화권과 기독교 문화권이 각자의 성지를 가졌으며 역사적으로 지배를 번갈아 해온 이 지역의 전쟁은 오늘날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자신들의 삶의 터전이 걸려있으며 스스로의 국가를 갖고자 하는 욕망이 얽혀있으니 서로의 문화를 존중하며 잘 살아보자는 식의 장밋빛 꿈은 어쩌면 영화에서나 가능할 지도 모르겠다.
외화 중에서는 한동안 눈에 띄는 기대작이 없던 극장가에 할리우드 대작 ‘킹덤 오브 헤븐’이 5월 4일부터 관객들을 만난다.
주인공은 떠오르는 스타 올랜도 블룸(‘반지의 제왕’, ‘트로이’)인데다 그의 뒤는 리암 니슨, 에드워드 노튼, 제레미 아이언스 같은 든든한 명배우가 받쳐주고 있다.
감독은 ‘글래디에이터’로 역사 대작 연출의 재능을 인정받았고 ‘블랙호크다운’으로 미국적 시각에서 벗어났다는 호평을 받았던 리들리 스콧. 영화는 오래간만에 괜찮은 대작을 기대하는 관객들의 발길을 잡아끌기에는 충분해 보인다.
여기의 중심이 되는 전투 장면은 바로 눈 앞에서 칼날이 휘둘리는 듯, 모래 먼지가 눈앞으로 튀는 듯, 사실감이 넘쳐나니 일단 이 영화가 볼거리라는 블록버스터의 미덕은 갖추고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젊은 대장장이 발리안(올랜도 블룸)은 아이와 부인을 잃고 슬픔에 잠겨있다. 아내를 땅에 묻은 날 그를 찾아온 사람은 십자군 기사 고프리(리암 니슨). ‘내가 너의 아버지’라고 발리안에게 고백하는 고프리는 함께 자신이 영주로 있는 땅으로 떠날 것을 제안한다. 고민하던 중 우발적인 살인을 저지른 발리안은 결국 고프리와 함께 가기로 하고 두 사람은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먼 길을 떠나게 된다. 동행 중 발리안은 아버지 고프리에게 검술을 배우며 전사로 거듭나지만 미처 예루살렘에 도달하기 전에 고프리는 세상을 떠나고야 만다. 난관을 극복하고 결국 예루살렘에 당도하는 발리안. 이 곳은 국왕 볼드윈 4세(에드워드 노튼)의 선정으로 기독교도와 이슬람교도 사이의 평화가 지켜지고 있지만 분쟁을 원하는 무리들 때문에 전쟁의 위협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발리안은 용맹함으로 왕의 신임을 받게 되고 아름다운 공주 시빌라(에바 그린)와 사랑에 빠지지만 상황은 그렇게 좋게만 돌아가지 않는다. 평화주의자 왕의 목숨은 이제 얼마 남지 않았으며 공주의 남편은 악명 높은 기사 기 드 루지앵(마튼 소카슨)이다. ‘서민적 영웅’이라는 몸에 잘 맞는 옷을 입은 올랜도 블룸이 평화를 지키기 위해 펼치는 모험담에 전투 장면의 볼거리와 로맨스, 비장함이 적절히 섞여 있으니 영화는 괜찮은 대작이라는 호평을 받기에 부족함이 없어보인다. 다면, 주인공이 살생을 싫어하게 되는 동기나 살인을 피하고자 왕위를 거절한 그가 결국은 수많은 적들에게 칼질을 하게되는 과정은 설득력이 약해보인다. 두 문화권이 서로를 존중하며 ‘천국의 왕국’을 만들어보자는 식의 흔한 결론도 할리우드영화치고는 전향적이지만 블록버스터의 틀에서 한치도 벗어나 있지 않은 쉬운 결론이다.상영시간 137분. 15세 관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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