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천(淸溪川)은 이름 그대로 물맑은 내였다. 청풍계천, 옥류동천이라고도 했다. 북악산과 인왕산 사이 골짜기에서 발원하여 남산에서 나오는 지류를 합쳐 중랑천을 거쳐 한강으로 유입된다. 조선 태종11년(1411년)에 대대적인 하천 정비사업을 했다. 양안에 본격적인 석축공사를 한 것은 영조 때다. 준설작업 또한 크게 벌였다. 청계천에 세운 광교·수표교·오간수교 등 24개의 다리는 한양 생활의 세시 풍속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청계천이 추한 ‘탁계천’이 된 것은 6·25 한국전쟁 직후다. 청계천 냇가 양쪽 길에서 하상에 기둥을 세워 달아낸 판잣집이 빽빽하게 들어섰다. 막걸리를 놓고 작부와 함께 젓가락 장단에 맞춰 ‘굳세어라 금순아’같은 전쟁가요를 부르는 니나노집 투성이었다. 돈 많이 안 들이고 전쟁의 상흔을 달랠 수 있었지만 이 바람에 청계천은 오물로 뒤덮였다.
마침내 판잣집 철거는 다 됐으나 이미 청계천은 물맑은 옛 청계천이 아니었다. 1958년 시작하여 1961년 완공된 것이 청계천 복개공사다. 복개된 너비 50m의 청계천로 위엔 광교에서 청계천 8가에 이르른 고가도로가 건설됐다.
청계천 복원은 불가능한 것으로 알고 포기했던 생태계 회복의 도전이다. 2002년 청계고가도로가 마침내 40여 년만에 철거됐다. 이어 청계천 복개도로가 뜯겼다. 그러나 속 살을 드러낸 청계천은 예전의 청계천이 아닌 것을 다듬어 정비한 것이 지금 추진하고 있는 청계천 복원사업이다.
수도 서울의 상징인 청계천을 살린 것은 잘 한 일이다. 사시사철 맑은 물 줄기를 대는 덴 물론 어려움이 많으나 어떻든 긍정적 평가가 가능하다. 그런데 호사다마라 할까, 청계천 복원사업을 둘러싼 추문이 꼬리를 문다. 행정2부시장 구속에 이어 서울시 관련자들이 줄줄이 쇠고랑을 차고 있다. 청계천 맑은 물 사업이 서울시 공무원들의 더러운 수뢰 추문으로 번지는 것은 정말 불행하다.
/임양은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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