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왜 남성인가

평등에 대한 자연법적 해석은 타고난 인권이다. 예컨대 생명 존중은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고 차별이 있을 수 없다. 이에 비해 인격권은 실정법적 해석이다. 천부의 권리가 아닌 후천적 권리다. 인권은 평등하지만 인격은 천차만별이다.

이 정부는 이를 혼동하고 있다. 인권과 인격권의 평등을 동일시 하는 것은 큰 착각이다. 후천적 평등은 기회의 균등이 있는 것이지 능력의 균등에 있는 게 아니다. 예를 들어 공부 잘하는 학생이나 공부 못하는 학생이나 똑같이 취급하는 것은 미래의 국가사회 발전을 저지한다.

인간의 불평등을 설파한 것은 프랑스 사상가 루소다. 그는 ‘인간불평등기원론’(1755년)에서 산업의 발달이 불평등을 가져왔다 면서 인성을 바탕으로 하는 정의가 이를 개조하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불평등사회는 이미 인류가 단체생활을 하면서 시작됐고 불평등의 요인은 개개인의 능력이 구분지었다. 정의란 것도 그렇다. 이해관계의 대립에서 저마다의 주장이 옳다고 우기는 것이 정의다.

더욱 간과키 어려운 것은 인간 차원이 아닌 남녀의 구분에서 보는 평등론이다. 남녀의 양성평등은 인간 차원, 즉 원천적 인간 존엄성의 평등이다. 그러므로 타고난 성별역할에 평등이란 존재할 수가 없다. 자연에 대한 거역이기 때문이다. 물론 오랫동안 여성이 남성의 억압에 시달려온 불평등을 외면하는 것은 아니다. 이러므로 여성들이 주장하는 양성평등론에 남성들은 참을성있게 인정해야 할 책임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을 남성으로 보는 것에 불만을 갖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여성부 등 여성계 일각에서 ‘하나님 아버지…’라고 하는 기독교 교리는 양성평등에 위배되므로 ‘아버지’란 말을 빼야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이 논리대로라면 예수가 남성인 것도 불만일 것 같다. 하나님과 예수가 남성이든 여성이든 그게 뭐 그리 문제이겠는가 싶다. 그런데도 이를 꼬투리 잡는 것은 소아병적 사고방식이다. 양성평등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생각 자체가 진정한 양성평등을 저해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임양은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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