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孔子·BC 552~479)는 정치가로서는 실패했다. 춘추시대 말 제후들은 부국강병에만 힘썼을 뿐, 공자의 인의덕치(仁義德治)주의 설교엔 귀도 기울이지 않았다. 천하를 주유하며 자신의 이상을 펼치려고 애썼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낙향하고 말았다.
그의 고향 산둥(山東)성 취푸(曲阜)에서 어느날 냇물가를 거닐다가 제자들에게 이런 말을 했다. “이 냇물처럼 밤낮 구별없이 세월도 흘러 이제 나도 늙었구나!”하고 한탄했다.(논어·자한편) 이때 공자 나이가 이미 칠십이었다. 그가 학문으로 유가(儒家)를 정립하는 데 성공한 것은 일흔셋으로 세상을 뜨기까지 고향에서 보낸 삼년 기간이었다. 정치가로서 실패한 평생을 말년에 학자로서 대성한 것이다.
한날 제자인 자공(子貢)이 공자에게 물었다. “자장(子張)과 자하(子夏) 중 어느 쪽이 더 현명합니까”하고. 자장과 자하는 자공의 선배격이었다. “자장은 너무 지나치고 자하는 미치지 못했구나”하는 스승의 말에 “그러면 자장이 위라는 말씀입니까?”하고 반문했으나 공자는 머리를 저었다. “아니다. 지나침은 미치지 못함보다 못하느니라”라고 말했다. 과유불급(過猶不及)이란 것이다.(논어·선진편)
공자는 중국의 공산화 혁명 이후 타도 대상이었다. 문화혁명 땐 봉건노예제 계급의 이익을 대변한 악질 사상가로 매도됐다. 혁명에 가장 걸림돌이 되는 부패 지식인으로 취급 당했다.
이토록 짓밟혔던 공자가 중국의 전통문화 핵심으로 찬란하게 부활하고 있다. 대표적 중화사상을 표방하는 ‘공자학교’의 외국 설립을 추진하고, 공자사당을 중수하여 제사를 거창하게 지낸다. 국영방송인 CCTV는 오는 28일에 있을 공자 탄신 2556주년 맞이 기념행사를 무려 4시간에 걸쳐 생중계할 예정이다.
개혁 개방으로 자본주의화한 중국의 현대사회에서 사회주의 이념은 이미 설득력을 잃었다고 보는 것이 공자 부활의 배경이다. 전통적 공자 사상으로 중국 문화의 우수성을 드높이는 것이 인민의 애국심을 유발하는 데, 한물 간 이념보다 더 낫다고 본 게 중국 정부의 판단인 것이다.
/임양은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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