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 프로그램의 표절 및 모방 문제는 이제 현상에 대한 문제제기로 그칠 사안이 아니다. 지금까지 방송사의 제작환경을 바꾸고 제작진의 윤리의식을 높여야 한다는 숱한 지적에도 표절 의혹이 끊임 없이 제기돼 온 것은 차별화된 연예·오락 프로그램의 제작이 그만큼 어렵다는 현실을 반영한다. 이런 표절 범람의 배경에는 방송위원회의 느슨한 판정 기준이 한몫한다.
2004년 개정된 방송심의규정 제33조 ‘표절금지’ 조항을 보면 ‘방송은 국내·외의 타 작품을 표절하거나 현저하게 모방하여서는 아니된다’고 명시돼 있다. 기준이 이처럼 애매하다보니 그동안 표절에 대한 심의건수도 2003년 이래 한 차례도 없었다. 방송사끼리만 서로 설전을 주고 받는 게 고작이다. 구성 및 진행방식, 아이디어 등을 일일이 법규에 규정할 순 없지만 현재의 심의규정은 좀 더 명확하게 다듬어 구체적인 가이드 라인을 제시할 필요가 있다.
잦은 논란에도 표절 의혹이 계속 반복되는 것은 턱없이 부족한 인력과 시간, 제작비 등 열악한 방송 제작여건이 꼽힌다. 그러나 언제까지 환경을 탓할 수는 없다. 연예·오락 프로그램 제작진들은 전세계에 한류 붐을 일으키고 있는 한국 드라마를 주목해 볼 만하다. 방송시장 규모나 제작여건 면에서 드라마 장르는 연예· 오락 장르만큼 열악하지만 우리나라 고유의 정서로 제작한 콘텐츠를 통해 경쟁력을 확보했다. 이를 토대로 수많은 드라마가 10 ~ 20여개국에 수출되고 있다. 반면 지금까지 해외에 포맷 및 판권을 수출한 연예·오락 프로그램은 ‘도전 골든벨’(KBS)과 ‘일밤’(MBC)의 ‘러브하우스’ 단 두 개에 불과하다. 특유의 콘텐츠를 개발하려는 적극적이고 장기적인 노력이 없었다는 방증이다. 또 판권을 구입해 떳떳하게 리메이크하는 방법도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다. 실제 ‘브레인 서바이버’(MBC ‘일밤’) 등은 일본에서 포맷을 수입한 뒤 다시 우리 정서에 맞게 발전시킨 코너로 큰 인기를 모았다.
최근들어 중국과 대만 등이 우리나라의 상품을 비롯해 아이디어, 아이템 등을 고스란히 베낀다는 지적이 늘고 있다. 이대로라면 우리나라도 언젠가 표절 및 모방의 피해국이 될 수 있다. 문화 수입국에서 수출국으로 발전하는 상황에서 연예·오락 프로그램의 정상적인 유통구조 정착이 시급하다. ‘바보 상자’가 ‘표절 상자’까지 되지는 말아야 한다. / 임병호 논설위원
로그인 후 이용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