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골

미·소 냉전시대에 이를 견제하는 제3세력으로 프랑스의 국제적 위상을 드높였다. 제2차대전의 영웅이었던 드골(1890~1970)은 제5공화국 수립후 대통령에 취임했다. ‘위대한 프랑스, 영광의 프랑스 재건’은 당시에 제3세력 거두로 유명했던 그의 구호다. 드골 집권 이전의 프랑스는 내각책임제였다. 2차대전이 종전되고 나서 국정은 산적한 터에 정치권은 싸움질로 영일이 없었다. 한 해에 내각이 두 세 차례씩 바뀌기를 수년동안 거듭했다. 정권이 이토록 불안정하다 보니 민생도 말이 아니었다.

드골이 알제리 전쟁의 위기에서 두 번 째 수상이 되어 대통령책임제의 헌법을 제정, 제5공화국의 대통령에 취임한 것이 1958년이다. 대외적으로는 중공을 승인하는 등 프랑스 국익의 실리외교를 추구하고 대내적으로는 경제부흥과 더불어 국민의 애국심을 고취시켜 역량화했다.

특히 반미·반소 정책을 철저히 일관했다. 파리에 설치됐던 북대서양동맹(NATO)군 사령부를 브뤼셀로 옮기게 한 것이 드골이다. 이만이 아니다. 프랑스군은 NATO에서 철수시키면서 독자적인 핵 무장을 추진했다. 이 무렵 해외 언론에서 드골을 풍자하는 만평은 콧대를 높게 그려 과장하기가 일쑤였다.

국내 정사(政事)에서도 나중엔 독주하기 시작했다. 주요 정책을 내각이나 주무부처 장관과 한 마디 의논없이 혼자 신문 라디오 등을 통해 발표하면서 무작정 국민의 지지를 당부하곤 하는 폐습이 심해졌다. 국민의 인기를 잃으면서 “장관은 뭘 하나요? 네, 장군(대통령)의 구두를 닦고 있지요?” 라는 풍자적 샹송이 나오기까지 됐다.

콧대 높았던 드골이었지만 국민투표에서 패배하자 군말없이 하야했다. 수도 파리를 떠나 향리로 돌아가 정치와는 완전히 담을 쌓았다. 동네 꼬마들과 어울려 놀아주는 동네 할아버지 노릇으로 여생을 보냈다. 1970년 8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생전의 유언으로 동네 공동묘지에 묻혔다. 오늘은 그가 천수를 다한 날이다. 프랑스 국민들은 그를 추모한다.

/ 임양은 주필

© 경기일보(www.kyeonggi.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댓글 댓글 운영규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