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이 첫째다

우리나라 초대 대통령 우남(雩南) 이승만(李承晩·1875~1965)은 기우제 우(雩), 남녘 남(南), 이을 승(承), 저물 만(晩), 아호와 이름부터 상징적이지만 가는 곳 마다 갈등과 풍파를 몰고 다니는 것으로도 유명했다. 박용만, 안창호, 김구, 미 군정, 한민당과의 갈등 등 그는 동지를 적으로 만드는 탁월한 능력을 보여줬다.

1948년 5월 31일 제헌국회 개원식에서 우남은 국회, 정부 수립에 대해 감사할 대상을 열거했다. 첫째는 ‘하나님’, 둘째는 미국, 셋째가 국민이었다. 우남에게 기독교는 신앙의 대상이라기보다는 현실적 집단이었고, 근대 서구의 문명부강의 근원이 기독교에 있다고 파악했다.

미국은 우남에게 ‘인간의 극락국’이었으며 ‘남의 권리를 빼앗지도 않을 뿐더러 남의 권리를 보호하여 주기를 의리로 아는’나라였다. 그 근거는 미국이 기독교를 바탕으로 한 나라이자 광대한 나라이기에 구태여 남의 것을 빼앗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혁명을 책동할 꿈을 꾼 일조차 없다”는 언명은 복화술의 대가인 우남에게 매우 보기 드믄 솔직담백한 고백이었다. 미국은 그에게 ‘아름다운 나라’이자 ‘한국의 조지 워싱턴’의 꿈을 실현시켜준 나라였다. 그런데 상황과 조건에 따라 갈등 구도는 변하였지만 우남이 평생 일관한 것은 ‘좌파와의 대립’이었다. “공산당은 마누라도 네것 내것 없이 같이 살자는 것이다”라는 천박한 주장을 펼칠 정도로 우남의 논쟁은 유치하고 다급했지만 그러나 효과는 탁월했다. 우남은 기독교와 미국을 통해 근대를 경험했지만 ‘부르봉’이라는 평을 들을 정도로 ‘하늘 아래 태양이 둘일 수 없다’는 정언명령을 평생 실천했다. 우남의 대통령 꿈과 병은 구분하기 힘들 정도가 돼 권력의 몽상과 질병은 ‘우리의 근대’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이 됐다.

만일 우남이 대통령 4선을 하지 않고 초대에서 물러났다면, 제헌국회 개원식에서 감사해야 할 대상 중 ‘국민을 첫째’로 언급했다면 한국의 현실은 달라졌을 게 분명하다. 좋든 나쁘든 1965년 숨진 우남 이승만의 언행이 생각나는 이유를 현 정권은 알아야 한다./ 임병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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