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 창간호

지금까지 알려지기로 우리나라에서 발행된 최초의 잡지는 1892년 1월 영국인 선교사 올링거 부부에 의해 창간된 ‘코리언 리포지터리’다. 이어 외국인들의 선교사업을 기반으로 한 영문잡지들이 계속 간행됐다. 1900년에 ‘트렌섹션 오브 더 코리아 브렌치 오브 더 아시아틱 소사이어티’가 발간됐으며 1901년엔 ‘코리아 리브’가 1904년에 ‘코리아 미션필드’가 뒤를 이었다. 이러한 영문잡지의 창간은 우리나라의 개화에 중요한 영향을 주었다. 우리나라의 잡지는 일본유학생, 단체, 학회 등이 주축이돼 발간했는데 개화·계몽이 목적이었다.

1905년 12월 우리나라 최초의 수학잡지 ‘수리학잡지’가, 1906년 11월 최초의 아동지 ‘소년한반도’, 같은해 순한글체인 ‘가뎡잡지’, 1908년 11월 ‘소년’이 창간되면서 잡지문화형성의 기폭제가 되었다. 일제강점기, 광복 이후 작금에 이르기까지의 잡지들은 시대의 거울이었다. 문화의 전달·보호 및 창조의 기능을 수행하면서 독자들에게 지식과 정보를 제공, 인류의 생활을 윤택하게 하는 매스커뮤니케이션의 한 형태로서 그 역할을 담당하였다. 특히 잡지의 창간호는 당시 사회상을 가장 절실하게 대변하는 횃불과 같았다. 창간호가 배태(胚胎)된 사회적·역사적·사상적 맥락에서 볼 때 더더욱 그렇다. 잡지 창간호를 수집하는 이유가 바로 그 역사성을 보전하기 위해서다.

지난 8일부터 14일까지 수원시립미술전시관에서 ‘해방 60년·잡지 110년 예술·문화를 담는 그릇 - 잡지창간호 김훈동 소장전’을 열고 있는 김훈동 수원예총 회장(시인·수필가)이 잡지 창간호에 갖는 애착심은 더욱 각별하다. 1963년부터 수집을 시작하여 잡지 창간호를 8천여 점이나 소장하고 있는 김 회장의 집 3개의 큰 방엔 책으로 꽉차 있어 앉을 자리도 없다. 지금은 결혼들을 했지만 아들만 3형제를 둔 김 회장은 아들들은 한 방을 쓰게 하고 크게 꾸민 방 세개를 잡지 창간호로 채웠다. 책 때문에 이사 갈 엄두도 내지 못한다. 이번 소장전엔 예술·문화 관련 창간호만 1천400여 점이 전시돼 관람객들을 놀라게 하는데 지금도 창간호를 찾아 동분서주하고, 만나는 사람마다 “창간호 갖고 계십니까”하고 묻는 등 열정이 대단하다. 농민신문 편집국장·농협경기지역본부장 등을 역임한 김 회장의 꿈 ‘잡지박물관’ 설립이 이뤄졌으면 좋겠다.

/ 임병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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