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불위와 시황제

중국의 여섯 나라를 통일한 뒤 사상 처음으로 황제가 된 진(秦)나라 시황제는 자초(子楚)의 아들인 영(?)씨가 아닌 여불위의 아들로 여(呂)씨 일 수 있다고 사마천이 쓴 사기(史記)는 말하고 있다. 원래가 거상이었던 여불위가 조(趙)나라 수도 한단에 장사일로 갔다가 진나라 태자인 안국군의 서자(庶子) 자초가 볼모로 와 있는 것을 알았다. 여불위는 자초를 찾아가 많은 돈까지 주면서 장차 왕위에 오를 수 있다며 희망을 심어주었다. 또 진나라로 가서는 공작금을 뿌려 안국군이 왕위에 오르면 자초를 태자로 삼도록 만들었다.

그러던 한 날 여불위는 한단에서 자신의 별장으로 자초를 초대해 융숭한 술대접 끝에 무희 조희(趙姬)를 잠자리에 들여보내 나중에 옥동자를 낳았는데 이 아이가 후일의 진시황이다. 그런데 조희는 여불위의 정부(情婦)로 이미 그의 씨를 잉태했을 때라는 것이다.

BC 257년 진나라가 드디어 조나라와 전쟁을 일으켜 볼모로 있던 자초의 신변이 위험해지자 여불위는 약 150㎏ 분량인 황금 600근으로 조나라 벼슬아치들을 매수해 자초를 자기 나라로 무사히 탈출시켰다. 후에 자초는 왕위에 올랐으나 병약하여 이내 죽어 조희의 아들 정(政·진시황)이 열세살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여불위는 이미 왕의 숙부 대우를 받으며 승상으로 문신후(文信候)의 봉작까지 받았다.

여불위의 투자(投資)와 영화(榮華)는 당장엔 별 가치가 없더라도 사두면 큰 이문이 남는다는 뜻으로 ‘기화가거’(奇貨可居)란 고사를 낳았다.

중국 산시(陝西)성 시안(西安)의 진시황릉에 부장품으로 유명한 병마용(兵馬俑) 군단의 주인이 진시황이 아니라는 주장이 중국 고고학계에서 제기됐다. 병마용의 전차 바퀴 등 모양새가 진시황대 보다 100여년 전의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반박도 만만치 않다. 병마용이 든 창에서 진시황대의 인물인 여불위의 이름이 새겨진 게 발견된 것으로 미루어 진시황대의 것이 틀림이 없다는 것이다.

의문의 부자 관계인 진시황과 여불위가 시황제 사후 2천215년이 되는데도 무덤에서까지 서로 얽혀있는 사실이 흥미롭다./임양은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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