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있는 아침/푸시킨의 모자를 쓰고-푸시킨 박물관에서(윤향기)

길고 부드러웠다

따뜻하기도 했지

사열한 유리진열장을 빠져나와

악수를 청하는 그의 손가락에서는

깊은 사유의 푸른 잉크 냄새가 났다

내가 태어나기 이전의 그림 속에서 그가

그리다 만 장닭이 갑자기 일어나

꼬끼오 훼를 치는 바람에 뒤돌아보니

그가 빙긋이 웃으며 떨리는 내 어깨를 끌어안았다.

“할 말이 있소

삶이 그대를 속인 적이 있던가요

그래도 노여워할 일이 아니라오

그대에게 이 말을 전해주고 싶었소.”

그때 안경을 썼었는지 기억은 없지만

검은 색 모자였지 아마

조용히 벗은 모자를 내게 씌워주고는 말없이

시대를 걸어 박물관으로 들어갔다

한동안 온기가 남아 있었다

<시인 약력> ‘문학예술’로 등단 / 시집 ‘그리움을 끌고 가는 수레’, 수필집 ‘로시난테의 오막살이’ 등 다수 / 드로잉 ‘새로운 바람전’, 도 판화 개인전 ‘흙, 바람을 채집하다’ 등 개최 / 한국시인협회·국제펜클럽한국본부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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