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에 이런 이야기가 전해 온다. 신라 사람 구진천(仇珍川)은 무기를 만드는 장인이었다. 그가 만든 ‘쇠뇌’는 석궁처럼 방아쇠 장치를 달아서 큰 화살을 멀리 쏠 수 있게 만든 활로 1천보(1㎞)가 넘게 화살을 날릴 수 있는 강력한 무기였다.
669년 겨울, 신라에 온 당나라 사신이 황제의 명령이라 하여 구진천을 당으로 데려가 쇠뇌를 만들게 하였다. 당나라는 신라와 연합하여 백제·고구려 정복전을 치르면서 쇠뇌의 위력을 실감했었다.
당 고종은 부왕과 김춘추의 약조를 무시하고 백제, 고구려는 물론 신라까지 손아귀에 넣을 야심을 품고 있었다. 그런 당 고종에게 신라의 쇠뇌는 두렵고 탐나는 무기였다. 구진천을 데려가 그 기술의 비밀을 알면 신라를 무력으로 굴복시키고 나아가 세계제국을 건설하는 데 첨단 무기로 유용하게 쓸 수 있으리라는 속셈이었다. 그런데 구진천이 당나라에 가서 만든 쇠뇌는 겨우 40m밖에 나가지 않았다.
고종이 그 이유를 묻자 현지의 재료가 불량해서라고 대답했다. 당나라는 다시 신라에서 재료를 구해 와서 고쳐 만들도록 했다. 이번에는 80m 정도 화살이 날아갔다. 구진천은 이번에는 신라에서 나무를 가져오면서 바다를 건넜기 때문에 나무에 습기가 배어서 그럴 것이라고 말했다. 고종은 구진천이 일부러 엉터리 쇠뇌를 만든 게 아닌가 하고 의심했다.
고종은 “잘 만들면 큰 상을 내리고, 만약 제대로 만들지 않으면 무거운 벌을 내리겠다”고 위협했지만 구진천은 끝내 그 재주를 발휘하지 않았다.
고종의 의심대로 구진천은 일부러 성능 좋은 쇠뇌를 만들지 않았다. 당나라가 신라를 치는 데 자기가 만든 쇠뇌를 사용할 것이 자명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그후 일어난 라·당전쟁에서 신라가 승리한 데는 구진천의 애국심과 불굴의 의지도 큰 몫을 했다.
구진천은 당나라에서 탐낼 정도로 뛰어난 지식과 기술을 소유하고 있었으므로 조국의 안위와 개인의 편안한 삶을 놓고 고민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조국을 먼저 걱정했다. 당시 최강의 당나라에 가서, 그것도 황제의 명령과 위협, 회유에도 불구하고 조국을 저버리지 않았다.
‘과학자에게 조국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구진천의 생애’가 떠오른다. 그렇다면 “과학에는 국경이 없지만 과학자에게는 국경이 있다”고 말한 황석우 교수의 진의는 어디에 있었을까. 개인의 영달인가, 대한민국의 과학을 위함인가.
/임병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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