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 660년 나당(羅唐)연합군에 의해 백제가 멸망하자 당시 백제의 수도 사비(泗?·현 부여) 부소산 서쪽 끝, 한 바위에서 궁녀 3천명이 백마강에 몸을 던진 것으로 전해 온다. 백제의 여인들이 꽃이 지듯 떨어졌다고 해서 그 바위를 낙화암(落花巖)이라고 부른다.
‘삼국유사’ 등에 나타난 기록으로 볼 때 당시 백제 여인들이 낙화암에서 몸을 던진 것은 사실이지만 3천명이라는 기록은 없다. ‘삼국유사’에 ‘궁인’으로 기록된 것도 궁에서 일하는 여성을 의미하는 것이지 후궁이나 왕의 상적 유희의 대상은 아니라는 말이다.
3천명의 궁녀를 거느린 의자왕(義慈王)의 방탕과 타락이 얘기되는데 그러나 의자왕은 방탕한 왕이 아니었다. 의자왕은 용감하고 결단력이 있고 행실이 후덕해 ‘해동증자(海東曾子)’로 불렸던 인물이다. 백제 멸망 5년 전에 신라의 30여개 성을 격파하기도 한 의자왕이 갑자기 타락했다는 것은 지나친 편견이다.
수 많은 궁녀를 통해 의자왕의 방탕함을 부각시켜 백제가 멸망하지 않을 수 없었음을 강조하려는 시각에서 나온 것일 가능성이 높다. 패자인 백제의 시각이 아니라 승자인 신라의 시각이 반영돼 역사를 왜곡한 것이라는 지적이 옳다. 여러 기록과 정황으로 보아 당시 궁녀가 3천명씩이나 존재했다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다.
3천명이란 숫자가 들어간 첫 기록은 16세기 조선 명종 때 민재인이 쓴 ‘백마강부(白馬江賦)’이다. 하지만 이것 역시 의자왕의 타락을 강조하기 위해 3천명이라고 과장한 것 같다는 주장이 많다. 그런데 왜 하필 3천명인가. 3천은 불교에서 삼라만상을 망라하거나 우주를 상징하는 뜻으로 쓰인다. 궁녀가 많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3천이란 수를 사용했을 것이라는 추론이 가능하다.
백제 마지막 왕 의자왕의 평가와 삼천궁녀, 낙화암 이야기는 상당부분 왜곡·과장돼 왔지만 부여(扶餘) 백마강에 가면 신라·백제·고구려의 삼국시대 역사가 떠올라 감회에 젖는다. 부소산에 오르면 황산벌을 지키던 계백(階伯)장군과 백제 군사들의 피어린 함성이 들려 온다.
백마강변 고란사에서 고란초 향기 담긴 약수를 마시면 낙화암에서 강심으로 뛰어 내리던 백제 여인들의 얼굴이 꽃처럼 떠오른다. 흘러갔다가 다시 흘러오는 노래 ‘꿈 꾸는 백마강’이 여울져 온다. / 임병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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