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태조 왕건(王建)은 여러 왕조, 역대 군왕 중 처첩을 가장 많이 거느린 임금이다. ‘고려사 후비전’에 전하는 정실 왕후, 부실 부인 등 후비(后妃)만도 28명에 이른다. 왕후는 신혜왕후(神惠王后)등 6명이며 부인은 정목부인(貞穆夫人)등 22명이다.
출신지역 또한 다양하다. 강원·황해·경기·충청·경상·전라도 출신이 모두 망라됐다. 출신성분 역시 다채롭다. 신라 왕족·토호·문관 또는 무관 대작 집안의 출신이 있는가 하면 미천한 백두 집안 출신도 있다. 왕건은 고려 건국의 일천한 기반을 각 지역, 각 계층별 출신 딸들과의 정략결혼으로 공고히했던 것이다.
그러나 허점이 되기도 했다. 왕건이 재위 26년만인 서기 943년 5월23일 67세로 생애를 마치면서, 제2왕후인 장화왕후 소생 무(武)를 후계자로 정해 2대왕이 된 혜종이 후사없이 2년만에 죽자 후비간에 알력이 벌어져 마침내 왕규의 난이 일어났다. 반란은 얼마 안 가 평정됐으나 왕위다툼을 둔 골육상쟁의 비극을 빚었다.
후삼국을 통일한 왕건의 청동좌상이 오는 6월초 서울에 온다하여 화제가 됐다. 서울 국립중앙박물관과 북쪽 조선력사박물관 간의 첫 번째 교류전을 갖는 것이다. 청동상은 북에서 오는 90여 점의 유물 가운데 하나다. 흥미로운 것은 왕건의 청동좌상은 실제 사람 크기와 같은 등신대(等身大)로 의자에 앉은 키가 143.5㎝다. 왕건 사후 만들어져 개성 봉은사에 안치됐는 데, 고려가 망한뒤 연천의 어느 사찰로 옮겨졌다가 세종 때 왕건의 능인 개성 현릉으로 옮겨 묻었던 것을 2003년에 출토한 것으로 전한다.
이상한 것은 청동좌상이 벌거벗은 나신(裸身)이라는 것이다. “원래는 옷을 입었으나 수백년동안 땅속에 묻혀있는 바람에 옷이 부식했을 것”이라는 게 북녘 관계자의 말이긴 하지만 이해가 잘 안 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왕건 사후에 만든 이 청동좌상은 당시 왕건의 모습일 것이라는 점이다. 왕건은 1천63년 전의 사람이다. 무려 1천년 전의 사람을 비록 청동좌상의 조각품이긴 하지만 실물 크기의 모습 그대로 볼 수 있는 것은 문화재로서의 높은 가치를 말해준다./임양은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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