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망이 유수하니 만월대도 추초(秋草)로다 / 오백년 왕업이 목적(牧笛)에 부쳤으니 / 석양에 지나는 객이 눈물겨워 하노라” 운곡(耘谷) 원천석(元天錫·1330~?)의 ‘회고가(懷古歌)”다. 이성계의 역성(易姓) 혁명으로 무너진 고려를 애도한 비가(悲歌)다. 원천석은 여말선초(麗末鮮初)라는 격동의 변혁기를 살았던 문인이다. 불사이군의 줏대로써 정치의 탁류를 건너뛰고, 마르지 않는 시심으로써 생의 부조리를 관조한 인물이었다. 원천석은 과거에 붙어 진사(進士) 명함을 얻기는 했지만 정작 관직에 나가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의 문재는 일찍이 중앙에 두루 알려졌다. 이색(李穡)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과 문예적 교유를 지속했다. 조선 개국의 으뜸 공신이었던 정도전(鄭道傳)과는 동갑 나이로 청년시절부터 교제가 돈독했다.
“동년(同年)인 원군이 원주에 숨었으니 / 다니는 길 험하고 산골도 깊어라 / 멀리서 온 친구 말을 멈추니 / 겨울바람 쓸쓸하고 날은 저물었네 / 그리던 나머지라 흔연히 웃고 나서 / 통술 앞에 다시 마음을 털어 내니 / 나는 노래 부르고 그대는 춤추네 / 이 세상의 영욕을 이미 잊었네” 공민왕 9년(1630년), 정도전이 치악산의 원천석을 찾아와 읊은 詩다. 원천석이 詩로 화답했다. “그대와 동방(同榜)한 지 몇몇 해인가 / 사귄 도리 새삼 깊다 얕다 할 것 없네 / 제각기 일에 끌려 두 곳에 있지만 / 사람 만나면 상세히 안부를 물었는데 / 오늘의 뜻밖의 걸음 하늘이 시킴인가 / 마시고 또 웃고 세세히 얘기하네 / 부디 그대는 돌아갈 길 재촉 마시라 / 우리의 이 뜻 자중하고 어렵게 여겨야 하리”
원천석은 강원도 횡성군 강림면 각림사(覺林寺)에서 어린 이방원(李芳遠)을 가르친 적이 있었다. 이방원이 훗날 조선조 3대 임금 태종(太宗)에 등극, 왕위에 오르기 직전 옛날의 스승을 찾아 치악산을 찾았다. 고명한 은사를 관직에 앉혀 정사를 의논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조선 왕권에 이바지할 의사가 없는 원천석은 이를 미리 알고 자신의 거처인 치악산 정상부 산골창인 변암(弁岩)의 굴바위를 떠나 은신했다. 원천석은 치악산 비로봉에 치악단을 조성하고 국운융성을 기원하는 제를 올리곤 했다. 조선의 성립 자체는 천운이라 하여 긍정했지만 건국 주체들의 패륜과 오륜은 가차없는 비판을 가했다. 치악산에 가면 1천114편의 詩를 남긴 원천석의 시혼이 보인다.
/ 임병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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